여기, 자폐인 있어요!
미디어 속 자폐 스펙트럼
영화 <그녀에게>가 개봉했다. 자폐 아이와 엄마의 이야기가 영화로 나온다는 이야기는 소문으로 들었던 터였다. 하지만 그다지 기대되지 않았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말아톤> 정도의 이야기겠지 라는 생각. 그리고 뻔한 이야기를 할 것 같다는 생각. 솔직히 말하자면 후자의 이유가 사실 더 강했던 것 같다. 매일매일 마주하는 전쟁 같은 나의 모습을 스크린에서 까지 봐야 할 이유가 뭐 있겠는가. 하지만 난 무언가에 이끌리듯 영화를 예매하고 연휴를 틈타 영화관을 찾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디어에서 비치는 자폐는 어떠한가. 누군가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우영우'를 생각할 것이고, 누군가는 영화 <말아톤>의 '초원이'를 생각할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는 영화 <샤인>의 '데이빗 헬프갓'을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에 비해 <그녀에게>의 이야기는 훨씬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말 그대로 나의 이야기였다. 한때 세상의 정의는 나 인양 생각했던 주인공이 바로 나였고, 아이의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주인공이 바로 나였다. 세상의 돌을 향해 미친 듯이 포효하던 주인공 역시 나였다. 너무나 나 같은 영화 속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많이 위로받고, 또 많이 뉘우쳤다.
<금쪽같은 내 새끼>의 열혈 시청자인 나는 종종 오은영 박사가 당사자 본인의 모습을 영상으로 마주하게 하는 모습을 본다. 절도를 하던 아이가 본인의 모습을 영상으로 다시 보기도 했고,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던 부모가 본인의 괴물 같은 모습을 마주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감정에 휩싸여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면 보이게 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 영화 <그녀에게>는 나에게 그런 의미였던 것 같다. 비바람 속에 있는 것처럼 정신없이 지나쳐온 아이의 영・유아기. 나는 미처 나를 살펴보지 못했었다. 그 시절 나는 기억상실증에 걸렸던 여자처럼 하나하나가 세세하게 되짚어지지 않았다. 아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인생과 아이의 인생에 얼마나 소중한 순간들인가. 영화 내내 그 순간들이 새록새록 기억이 나서 감사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여전히 진지한 장애인 영화라는 점이었다. 우리 사회는 이 전에 비해 타인에 대한 이해와 포용이 많이 넓어졌다. 아직 100%의 시대로 가기 위한 과도기에 있지만 (물론 100%의 시대는 유토피아일지도 모른다.) 확실히 달라졌다. 영화들도 <오아시스>, <말아톤>에 비하면 <그녀에게>는 많이 현실 안으로 들어와 있다. 그리고 요즘은 드라마에서 조연으로 등장하는 장애인의 모습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우리들의 블루스>, <일타 스캔들>, <사이코지만 괜찮아> 등. 쉽게 마주할 수 있는 그들의 모습은 세상의 거부감을 확실히 줄여준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보이는 그들의 생활은 현실 극복의 모습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진지하기 그지없다.
미국 CBS의 유명 시리즈 중 <빅뱅이론>이 있다. 그 주인공 중 한 명인 ‘셜던’은 괴짜다. 어딘가 이상한 그의 모습을 보면 자폐스펙트럼이 생각난다. 하지만 그 시리즈 어디에도 그를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고 지칭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못 봤을 수 있다.) 세계인구 44명 중 1명이 자폐성 장애를 가졌다고 하면 오늘 우리가 만나는 사람 중 한 명 이상은 어려움이 있는 사람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내가 알게 모르게. 그들은 매일 고군분투하지만 한편으론 고군분투하지 않는다. 그저 나와 똑같이 삶을 살고 있다. ‘셜던’처럼 말이다.
언젠가 우리 사회에서도 미디어에서 나오는 자폐인의 이야기가 그냥 그런 이야기가 되는 날이 있을까. ‘여기 자폐인 있어요!’가 아닌 그냥 ‘여기 나 있어요!’가 되는 날 말이다. 그날을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