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는 인간의 장기 이식을 목적으로 복제된 클론들의 삶을 다룬 소설로, 주인공 캐시, 루스, 토미의 성장과 우정, 사랑, 그리고 비극적인 운명을 따라간다.
이야기는 외부와 단절된 기숙학교 ‘헤일셤’에서 시작된다. 캐시, 루스, 토미는 이곳에서 평범한 학생처럼 성장하지만, 학교에서는 ‘기증’, ‘간병사’ 같은 낯선 단어들이 일상적으로 쓰인다. 학생들은 예술 작품을 만들어 ‘마담’이라는 외부 인물에게 제출하고,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건강에 집착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장기 기증을 위해 만들어진 클론임을 어렴풋이 인지하지만, 명확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지는 못한 채 성장한다
졸업 후 이들은 ‘코티지’라는 곳으로 옮겨가 성인기를 보내며, 인간 사회와의 간접적인 접촉을 경험한다. 이 시기 루스와 토미는 연인 관계를 맺지만, 캐시와의 우정 사이에서 갈등이 생긴다. 코티지에서의 생활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존재 목적, 그리고 인간과의 차이를 더욱 명확히 인식하게 만든다. 이후 캐시는 간병사로 일하게 되고, 루스와 토미는 장기 기증자로서 삶을 시작한다.
이후 루스는 기증을 반복하다 죽음을 맞이하고, 캐시는 토미의 간병을 맡는다. 루스의 권유로 캐시와 토미는 ‘마담’을 찾아가 진정한 사랑을 증명하면 기증을 유예할 수 있다는 소문을 확인하지만, 그런 제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냉혹한 진실만을 듣게 된다. 결국 토미도 네 번째 기증 끝에 사망하고, 캐시 역시 곧 기증자가 될 운명을 받아들인다.
이 소설은 막스 베버의 쇠우리, 즉 관료제와 형식합리성이라는 현대 사회에 대한 개념을 생각나게 한다. 관료제란 부서들의 위계들로 구성된 대규모 조직이다. 베버는 관료제가 사람들을 가두고 그 안에서 사람들의 기본적인 인간성이 부정된다는 점에서 이를 '쇠 감옥'이라고 표현했다.
‘쇠감옥’과 마찬가지로 코티지는 클론들의 삶의 선택권을 배제하고, 그들을 수단으로서 사용하여 클론들의 기본적인 인간성이 박탈되는 공간이다. 이러한 코티지의 마담은 ‘진정한 사랑’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진짜’ 인간을 위한 도구로서 클론들을 대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인간이라는 종 자체의 본질을, 휴머니즘적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이라는 인간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클론과 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이 사라짐으로써 장기기증을 받는 대상인 인간도, 그를 위해 일생을 바쳐야 하는 클론도 다 돈벌이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이미 ‘클론’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복잡해지고 유동적이게 되어버린 신자유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장기들을, 우리의 본질을 샅샅이 뜯어 먹히도록 내버려 둬야 하는지도 모른다. 코티지에서, 쇠우리에서 빠져나갈 방법인 진정한 사랑의 증명은 불가능한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인가?
우리는 이미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지니는 감정들이 진실됨을 알고 있다. 다만 임의적으로 부정당한 것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사회라는 체계가 주체인 인간을 외려 전도한 이 세상에서 우리의 인간성 또한 합리성을 위해 임의로 미지수가 되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인간성은 증명이 불가능하다. 정확하게는 이미 증명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이 지나온 역사 속 인간의 선택들이 인간성이란 무엇인지 평가되고 성찰되며 드러내고 있다. 즉, 우리가 이 쇠 우리를, 클론들이 코티지를 빠져나갈 수 있는 자격은 차고 넘친다. 단지 우리가 우리 위에 군림하고 있는 합리성이라는 진리를 이기지 못한다면 결국 자신을 또다시 이 세상에 잡아 먹히도록 내버려두는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