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서평집

<날개>(이상) 서평

by 최시헌

‘나’는 아내를 무척이나 아낀다. 자기 좁은 방에서 사는 데에서 삶의 만족을 누린다. 행복이니 불행이니 세속적인 계산을 떠난 절대적인 상태이다. 해가 드는 방이 내의 방이고 그렇지 않은 방이 ‘나’의 방이다. 아내가 외출을 하면 ‘나’는 아내의 물건을 가지고 논다. 돋보기나 거울을 가지고 놀기도 하고 아내의 화장대에 가서 아내의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아내의 치마들을 보며 그녀가 취할 포즈들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검은색 양복과 스웨터가 전부이다. 논문도 쓰고 시도 짓고 발명도 해본 ‘나’이지만 잠에 들면 그런 것들은 비누거품 같이 허무할 뿐이다.

나’는 가장 게으른 동물처럼 게으른 것이 좋았다. 될 수만 있다면 이 무의미한 인간의 탈을 벗어버리고도 싶었다. ‘나’에게는 인간사회도, 일상생활도, 모두 낯설다. 아내의 직업은 무엇인가? 아내는 자주 외출할 뿐만 아니라 아내의 내객도 자주 온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아내에게 그녀의 방으로 불려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반찬이 엉성한 밥을 아내로부터 받아먹는 탓에 영양부족에 시달린다.


아내가 내객들이 떠나고 나면 받는 돈을 ‘나’에게 주면 왠지 기분이 불쾌해져서 아내가 준 돈을 변소에 버렸다. 애초에 ‘나’는 따로 돈 쓸 일이 없다.’나’는 이렇게 부지런한 지구 위에서는 현기증도 날 것 같고 해서 한시바삐 내려버리고 싶었다. 어느 날은 외출하다가 오는 길에 내객이 있는지 확인하려 했다.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은 아내가 내객과 소곤거리는 장면이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사실 ‘나’ 또한 밤새 아내가 준 돈을 어떻게든 쓰려다가 까무룩 아내의 방에서 잠이 들었다. ‘나’는 외출하는 것에 맛을 들여 또 거리로 나섰다. 자정이 지나기 전에 집으로 들어가려다 아내와 아내의 남자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기로 했다. 이후 이틀 동안 아내가 안 보이다가 아내가 밥을 주었다.


그러나 아내가 돈을 주지 않자 자신은 외출할 수 없다는 생각에 종일 울었다. 그러다가 아내가 결국 돈을 주자 신나게 나서서는 비가 오자 그걸 흠뻑 맞고 집에 왔다. 그리고 감기약을 먹으며 한달을 보냈다. 수염과 머리가 너무 자라서 거울 보기로 하고 아내의 화장대에 갔다. 그런데 그 밑에서 최면약 아달린 갑을 발견했다. 그는 지금까지 아스피린이 아닌 아달린을 먹어왔던 것이다.


정신을 잃을 듯이 충격을 먹은 ‘나’는 길가의 벤치에 앉아 아스피린과 아달린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다가 머리가 복잡해지자 그냥 벤치에 누워 남은 아달린 여섯 알을 먹었다. 그렇게 일주야를 보냈다. 집에 들어가니 아내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화를 내어 억울해진 ‘나’는 어느 건물 옥상에 올라섰다. 그의 평생 스물 여섯해를 회고해보아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거의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조차도 어려웠다.


그러다가 경찰차 소리가 나고 사람들이 소란스러워지자 혼란함을 느낀 ‘나’는 문득 몸에서 날개가 나는 것을 느끼며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라고 외치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1930년대 한국문학의 초현실주의 시인이자 자의식 문학의 선구자인 이상(李箱)의 작품이다. 이상이라는 작가의 이름과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유명한 문구 탓에 익히 알려진 작품이지만 난해하여 실제로 읽힌 경우는 드물 것으로 보인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라는 이 소설의 첫머리는 ‘나’라는 사람이 본래 천재, 즉 지식인이었으며, 박제가 되었다고 말할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음을 암시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내와의 연애는 유쾌했다. ‘나’는 평소에 담배를 많이 피우며 작품을 썼는데 약간의 몽롱함을 느낄 때 글이 잘 나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19세기를 봉쇄해버리라더니, 화를 볼 것이라 말하는 것을 보면 19세기 문학과 관련해 모종의 이유로 자신의 분야에서 비판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더해 감정은 어떤 포즈가 부동자세에 도달할 때까지 에너지를 공급한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봐서 아내와의 연애 또한 감정이 식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프롤로그가 끝난 후에 등장하는 ‘나’는 날카로운 지성을 가진 천재와는 딴판이다. 게으르고 유유부단하며 아기 새마냥 아내만 바라보고 아이처럼 아내의 물건들을 가지고 노는 장면들은 전혀 상반되는 모습이다. 게다가 자신이 그동안 논문도 쓰고 시도 쓰고 하던 것들을 전부 비누거품처럼 허무하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 사회 자체가 낯설다 한다. 또 부지런한 지구 위에서 한시 바삐 내리고 싶다고도 한다.


그러다가 아내가 자신에게 주던 약이 최면약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충격을 먹고 도망친다는 점에서 나는 사실 아내는 남자의 병이 일종의 정신적인 병이었음을 알고 있었으며, 밤에 돌아다니는 야맹증 같은 것등을 치료하기 위해 최면약을 먹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소설 자체가 난해하여 사람마다 해석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아내는 남편이 일을 하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돈을 구하려고 했고 가난해도 남편에게 돈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차라리 도망을 치지 왜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걸 이해하기에는 찬란하던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린 상태였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박제된, 이미 인정받았던, 그러나 이내 버림받았던 자신의 모습에서 벗어나 새로이, 이번에는 날개가 있는 새처럼 날아보고 싶다는 무의식 중 마음이 들어서 빌딩 아래로 몸을 던진다.


이 모든 정신적 병리현상을 의식적 흐름의 형식으로 써내려간 이상은 선구자임에 틀림없음은 물론이니와 이는 근대 조선 지식인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한다. 밤처럼 깜깜한 운명 가운데 해메이는 것도, 19세기를 전후로 망가져버린 정신도 그렇고, 무엇보다 방치되고 갇힌 좁은 방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고 싶어한다는 점도 말이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어느 유튜브 플레이리스트 제목을 보고 문득 생각나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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