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서평집

<키르케 Circe> 서평

by 최시헌

키르케는 티탄족의 수장인 헬리오스의 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아무런 신적인 힘을 가지지 못했고 이 때문에 가족들은 그녀에게 무관심하거나 그녀를 괴롭히곤 하였다. 어느 날은 프로메테우스가 인간들에게 지식을 가져다주어 형벌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키르케는 프로메테우스가 자신이 형벌을 받을 것을 예지했음에도 인간들을 도운 것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러다가 키르케는 순박한 인간 어부에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에게 키르케는 너무나도 경외로운 존재였기에 짝사랑일 뿐이었다. 어부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키르케는 그가 죽는 것이 두려워 금기를 깨고 그를 반신으로 만든다. 결국 그녀는 이 일로 외딴 섬으로 유배된다.


어느 날은 인간들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순박한 사람들인 줄 알았지만 점점 교활한 본성을 드러내자 키르케는 그보다 더 잔혹한 방법으로 인간들에게 벌을 주었다. 그렇게 인간들에 대한 환상이나 애정마저도 사라졌을 때, 오디세우스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지혜롭고 타인을 존중할 줄 아는 보기 드문 영웅이었다. 키르케는 애써 내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그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되어 아테나가 오디세우스를 고향으로 데려가자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오디세우스와 함께 낳은 아들이었다. 키르케에게 필멸의, 연약한 인간 아이는 언제나 잃을까 봐 두려울 만큼 자신의 목숨보다 귀중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아이가 독립하여 기어이 아버지인 오디세우스를 만들러 갔을 때 모종의 사고로 오디세우스가 죽게 만다.


그리고 오디세우스의 본처인 페넬로페가 그녀와 오디세우스의 아들인 텔레마코스와 함께 찾아온다. 그들은 오디세우스의 죽음의 대가로 텔레마코스 대신 키르케의 아들을 아테네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했고 키르케는 아테네의 요구대로 영웅이 되는 잔혹한 시련에 아들을 보낼 수밖에 없게 된다.


철없이 모험에 설레어하는 아들을 한없는 슬픔 속에 놓아준 키르케는 잠시 늙어가는 신이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 후에 신보다는 어찌 보면 인간에 가까웠던, 그러나 필멸이 아니었기에 누렸던 행복과 겪었던 불행 모두를 축복하며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러 간다.


이 책의 저자 매들린 밀러는 고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가들 가운데서도, 무엇을 다시 말할 것인가보다 어떤 질문을 다시 던질 것인가에 더 관심을 두는 작가다. 그녀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그대로 되풀이하기보다, 왜 그런 이야기가 가능했는지를 묻는다. 『키르케』에서 3천 년 가까이 주변부에 머물던 여신에게 서사의 중심을 내어준 것 역시, 이 오래된 서사에 남겨진 침묵을 다시 바라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키르케의 청년 시절을 사로잡았던 생각은 인간에 대한 호기심과 환상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나약한지 한편으로는 얼마나 사악한지 알게 된 이후로는 인간에게 실망하게 되지만 오디세우스를 만나고 그녀의 아들을 키우면서 키르케는 위대한 여신이 아닌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며 스스로 인간이 무엇인가를 체험하게 된다.


나약하기에 신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지켜야 할 사랑을 위한 희생을 하는 인간의 고귀함을 키르케는 진심으로 존경하고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인간의 삶을 관망하며 그것들을 유희로 삼는 저 멀리의 신들과 달리 키르케의 삶이 인간의 삶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힘없는 여신의 관점으로 바라보았기에 오히려 신과 인간 모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것은 또 하나의 아이러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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