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인문고전의 탈을 쓴 자기 계발서 정도로 대중들에게 익숙한 듯하다.실제로 여러『군주론』번역본 혹은 그것을 자처하는 책들은 이를 사상적이라기보다 기능적으로 소개한다. 그러나 만일 이 책의 저자 마키아벨리가 이 현상을 본다면 그는 이 책의 독자는 정치인이지 기업가나 사회적인 리더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애초에 이 책은 일반적인 조직 내 권력 문제라기보다도 한 나라를 통치하는 군주의 처세와 역사, 인생철학을 모두 아우른다. 케케묵은 사고방식이지만 마키아벨리는 이 책을 읽는 사람은 범인이 아니라 선택되었으며 노력가인 사람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나는 그렇다고 『군주론』의 독자를 차별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점 때문에 이 책을 비판적으로 분석해보고자 한다.
이 책에 수록된 『마키아벨리의 꿈』(2012) 논문에 따르면 『군주론』의 진정한 관심사는 신군주에 있다. ‘자신의 군대와 덕’(비르투)로써 ‘운명적인 힘(포르투나)’를 쟁취하는 군주의 이념이 『군주론』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비르투가 권장되는 지점은 구체적으로 권력이라는 현상에 있는데 이것은 언제나 예외적이다. 에외적이라는 말은 본질상 일반 도덕이 통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비르투로서 요구되는 능력은 오직 필요성과 유용성에 의한 능력들 뿐이다. 권력이란 윤리라는 이름으로 부패하게 된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논지이다. 그는 인간 본성이 이기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악명 높게 혹은 지헤로써 높게 평가하는 ‘사자의 힘’과 ‘여우의 책략’이라는 행위 윤리의 단초이다.
예를 들어 군주는 사랑받기보다 공포의 대상이어야 하며 사악하고 비인간적인 방법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당시에는 이것 자체만으로도 『군주론』은 금서로 지정되었지만, 지금 내가 비판하고자하는 내용은 이러한 현상적 사레들보다도 이를 이끌어내는 행위 윤리의 단초이다.
필요에 의해서만 동원되며 권력 혹은 힘에의 의지가 부패되는 이유가 오히려 그 윤리 때문이라는 마키아벨리의 관점은 선악의 저편 혹은 가치전도의 니체나 히틀러의 나치즘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다. 운명적 힘인 포르투나를 비인격, 혹은 가치중립적으로 놓고 역으로 자신의 ‘비르투’로 그것을 쟁취하는 것은 위버멘쉬, 초인의 초상이고 그것이 타락한 것이 히틀러의 나치즘이라고 보면 맥락이 이어진다.
중요한 점은 『군주론』은 니체와 히틀러에게뿐만 아니라 현대 정치 철학 전반의 시작을 알리는 저작이라는 것이다. 만일 『군주론』의 가치 중립성과 현실주의가 현대 정치에 극단적으로 영향을 준다고 해도, 우리는 정치를 윤리의 법정으로 불러세울 인간 본성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에 대해 맞설 수가 없다.
오늘날의 파시즘과 인민주의가 그러하다. 페데리코 핀첼슈타인의 『파시즘과 인민주의의 역사(2025)에 의하면 인민주의 혹은 포퓰리즘은 파시즘의 아종이며 파시즘은 현대 정치학에서 시작했다. 다만 파시즘은 철저히 배타적이었던 반면에 인민주의는 선거 민주주의의 기생충으로 살아간다.
특히 후자인 인민주의는 보다 독특한 어떤 의미에서의 더 철저한 마키아벨리즘을 실천한다. 마키아벨리는 분명 공포의 대상이 되는 군주가 되라고 했을지언정 미움받지는 말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파시즘은 미움받았고 그래서 패배했다. 인민주의는 미움당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들은 이중적이게도 권위주의적 형태의 민주주의를 추진하게 된다.
핀첼슈타인의 말처럼 인민주의가 오늘날 서구 지역에만 특정하게 분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제정 혹은 세습 군주정인 북한이나 러시아, 중국이 아니고서야 인민주의의 중심이 되는 것은 단연 미국의 트럼프이다. 인민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문명사적 승리(Avenage)를 추구하는 트럼프주의는 비르투로 신자유주의적 포르투나에 올라탄 것과 같다. 무식한 독재보다 마키아벨리즘적인 사고를 활용한 것이다.
여러가지 면에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명확히 긋지 않은 책임을 져야 한다. 유일하게 우리가 마키아벨리에게서 얻을 수 있는 안티 테제가 있다면 ‘군주는 만들어지되(비르투), 도덕(포르투나)에 의해 이끌어져야 한다.’ 일 것이다. 아무리 정치 지도자라 해도 도덕의 입법을 거슬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독재자를 막을 것인가, 만들 것인가』(아이라 샬레프)에 따르면 추종자, 지도자를 만드는 집단에는 5계층이 있다고 한다. 제 5계층은 대중, 즉 ‘인민’에 해당하는 사람들로 인민주의에 넘어갈 가능성이 잠재된 국가의 세포들이다. 그리고 내가 본질적으로 강조하고 싶은 계층은 제 4계층, 활동가 조직가들로서 신군주의 위험을 깨닫고 이를 저지하려는 이들이다. 이들은 용감하지만 그렇기에 신군주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는다.
나는 아직 이들 집단에서 활동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아들 자체에게 전할 권고는 없지만 최대한 많은 비판적 지식인들이 이 거대 담론에 참여하기를 바란다.(어떤 세대 혹은 어떤 성별이든지간에) 그리고 이들 가운데
누군가가 더이상 ‘군주’도 ‘신군주’도 아닌 진정 예언자로서 우리를 이끌게 된다면 그를 가르칠, 혹은 만들어낼 올바른 도덕 이념형과 인간본성론을 보다 정교히 정립해야 한다. 아직 이 시대는 암흑기이고 메시아가 오기에는 한참 멀어보이지만 우리는 더이상 구원자를 기다리지만 말고 우리 자신이 시대의 구원자로서 각성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