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알코올중독자 아빠. 내가 사랑하는.
늘어진 난닝구를 입고 주방을 서성이는 아빠에게선 술 냄새가 난다. 안주할 게 없나 기웃거리는 그 몸짓이 짜증나면서도, 고주망태 상태로 뭘 챙겨먹겠나 싶어 걱정되는 마음도 함께 올라온다.
아빠가 싫으면서도 짠해서 더 짜증이 난다. 마음 놓고 미워할 수도, 마음 편히 사랑할 수도 없어 내 마음은 오도가도 못한다.
결국 아빠가 찬장에서 라면을 하나 꺼내들었다. 맨날 먹는 저 라면. 몸에 좋지도 않은 저걸 아빠는 하루 걸러 하루씩 챙겨먹는다. 나는 괜시리 걱정되어, 가스불을 켜는 아빠 뒤편으로 괜히 어슬렁대며 말을 걸었다.
"아빠, 라면 먹게?"
그랬더니 아빠가 술 취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래. 니도 주까? 한 젓가락 먹을래?"
한 젓가락 줄까? 하는 관대한 제안은 아빠가 기분이 좋을 때만 나온다. 나는 아빠가 나에게 뭔가 해주려는 이 순간이 좋아 아빠 옆에 괜히 서 있지만, 아빠가 몸에 안 좋은 라면을 먹는 건 말리고 싶은 마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안 먹을래. 아빠도 많이 먹지 말고. 저녁은 안 먹었어?"
술에 절은 아빠는 가스불도 제대로 켜지 못한다. 나는 아빠 대신 불을 켜주고, 삐뚜룸하게 놓인 냄비도 바로잡은 뒤 뚜껑을 덮어주었다.
"어-- 먹었지!"
술 취한 아빠의 목소리는 늘 한 톤 높다. 그 소리를 듣는 것도 싫고, 고주망태가 된 모습을 보는 것도 싫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아빠는 밤 10시 이전에 퇴근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잔업이 많아 늦을 때도 있고 회식이 있어서 늦을 때도 있었다. 그 시절에는 모두가 그랬을 테지만 아빠는 특히 심했다.
비틀비틀한 걸음으로 현관을 열고 들어와 술냄새를 물씬 풍기며 미소를 지어보이던 아빠. 항상 비슷한 기분 좋은 톤으로 "00아~"라고 노랫가락처럼 내 이름을 부르곤 했다.
그 소리에 어린 강아지처럼 달려나오는 나를 품에 안고, 낡고 지저분하고 큰 손으로 어린 내 머리통을 쓱쓱 쓸어다주던 아빠. 같이 따라나와 "밥 줄까요?"하고 묻는 엄마에게는 다시 없을 무뚝뚝한 목소리로 "됐다."라고 말하던 경상도 아저씨.
아빠는 씻고 나오면 늘 라면을 찾았다. 엄마가 한사발 끓여서 대령하면, 그 감칠맛 나는 냄새에 홀린 듯 이끌려온 내 머리통을 또 쓱쓱 쓸어다주고, "니 한 젓가락 주까?"하고 묻곤 하던 그.
물론 엄마는 밤에 애한테 라면 준다고 싫어했지만, 나는 그 시간에 아빠 곁에 붙어 아빠가 수저에 정성스레 올려준 진라면 한 숟가락을 얻어먹는 걸 좋아했던 것 같다.
그게 아빠의 사랑이라고 느끼기도 했던 것 같고.
"어, 어잇, 어어이고!"
결국엔 사달이 났다. 티비 앞에서 먹으려고 냄비를 쟁반에 받쳐 들고 가던 아빠가, 취기에 비틀대다 결국 라면을 장대하게 쏟아버리고 만 것이다.
엎어진 라면과 냄비를 앞두고 아빠가 어쩔 줄 몰라한다. 어어잇, 아이고 뜨거버라.
"으이고오! 그러게 잘 좀 놓지."
왠지 모를 속상한 마음에 핀잔하며 걸레를 찾아 나서는 사이, 아빠는 급한 성질에-- 그리고 민망한 마음에서인지, 그 뜨거운 라면을 맨손으로 막 주워담았다.
"아이고 뜨거버라, 아잇, 에이 씨발--"
몇 가지 욕설을 찌그리는 아빠의 목소리. 그 욕설이 듣기 싫었는지, 낡고 지쳐버린 아빠의 실수가 서글펐는지, 나는 와락 화가 나면서도 서글퍼졌다.
그야 당연히 뜨겁지 끓던 건데. 그걸 맨손으로 막 주워담으면 돼? 좀만 기다리면 내가 걸레 찾아서 줄 텐데. 그거 엎은 게 뭐 큰일이라고.
그건 아빠의 민망함이었을 테다. 술 마시는 걸 싫어하는 딸들 앞에서 매번 취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아빠는, '취해도 멀쩡하니까 계속 마시는 거야'라는 당당한 소리를 주워섬기곤 했다.
그런 아빠가 술에 취해 손이 미끄러진 것을, 음주를 말리는 딸 앞에서 보이는 것은 결국, 본인의 나이듦과 삭아감에 마주하는 느낌이지 않았을지.
그래서 나는 걸레를 찾아 서랍을 뒤적이면서도 괜시리 코끝이 찡해졌던 것 같다.
모르겠다. 이것이 서른 남짓 나이먹은 딸의 주제넘은 지레짐작인지. 아빠는 아무 생각 없는데 나 혼자만 이렇게 혼자 서글펐다 화가났다 하는 건지.
어린 강아지 같던 나를 안아주던 그 커다란 손은 어디가고, 저렇게 허름하고 초라한 난닝구 아저씨만 남아있는지.
쏟아져내리는 온갖 신파적인 생각을 멈춘 것은, 라면을 쏟는 소동을 듣고 안방에서 나온 엄마의 말이었다. "아니, 쏟았어요? 그냥 둬요. 새로 하나 끓여줄게."
엄마는 태연자약했다. 아빠가 난닝구를 입고 있든 말든, 라면을 쏟든 말든. 내가 아빠에게서 이제는 사라져버린 옛날의 젊고 기운넘치고 술에 취해도 멀쩡했던 아빠의 모습을 찾든 말든.
그 덤덤하고 평이한 말투에 풋 하고 웃음이 터져버렸던 것 같다. 그래 맞아, 이게 무슨 별 일이라고. 쏟은 라면은 대강 치우고 새 라면을 끓여먹으면 되지. 낡고 해진 난닝구처럼 되어가는 아빠의 모습도, 그런 자연스러운 나이듦이라고 받아들이고 이해하면 되지.
덤덤한 엄마의 평온이 옮아갔는지, 욕지거리를 주워섬기던 아빠도 순간 조용해졌다. 민망함이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단지 새 라면을 준다는 사실에 사탕을 빼앗겼다가 다시 새로운 초콜릿을 받아든 어린애처럼 마음이 풀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 모습을 보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 그냥 이렇게 살아가면 되지. 그게 뭐 큰 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