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무도 잊지 않고 있는
기이한 사람들. 지나가면서 기껏해야 쉬 지워져버리는 연기밖에 남기지 못하는 그 사람들. 위트와 나는 종종 흔적마저 사라져버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곤 했었다. 그들은 어느 날 무(無)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버린다. 미(美)의 여왕들, 멋쟁이 바람둥이들, 나비들.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못했다. 위트는 ‘해변의 사나이’라고 불리는 한 인간을 나에게 그 예로 들어 보이곤 했다. 그 남자는 사십 년 동안이나 바닷가나 수영장가에서 여름 피서객들과 할일 없는 부자들과 한담을 나누며 보냈다. 수천수만 장의 바캉스 사진들 뒤쪽 한구석에 서서 그는 즐거워하는 사람들 그룹 저 너머에 수영복을 입은 채 찍혀 있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며 왜 그가 그곳에 사진 찍혀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아무도 그가 어느 날 문득 사진들 속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나는 위트에게 감히 그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 ‘해변의 사나이’는 바로 나라고 생각했다. 하기야 그 말을 위트에게 했다 해도 그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해변의 사나이’들이며 ‘모래는 -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 우리들 발자국을 기껏해야 몇 초 동안밖에 간직하지 않는다’고 위트는 늘 말하곤 했다.
...
그들이 지나간 뒤에도 무엇인가 계속 진동하고 있는 것이다. 점점 더 약해져가는 어떤 파동, 주의하여 귀를 기울이면 포착할 수 있는 어떤 파동이. 따지고 보면 나는 한 번도 그 페드로 맥케부아였던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었다. 그러나 그 파동들이 때로는 먼 곳에서 때로는 더 세게 나를 뚫고 지나갔었다. 그러다 차츰 차츰 허공을 떠돌고 있던 그 모든 메아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였다.
- 파트릭 모디아노(김화영 옮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모래는
우리의 발자국을
기껏해야 몇 초밖에는
간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몇 초의 발자국이 모인
결정체가 지금의 나이다.
문제는
결정체인 나는 남지만
근원인 모래 위 발자국은
이미 모두 사라진 뒤라는 것이다.
다시 찾으려 애써도 찾을 수 없는,
그래서 이제는 그런 흔적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희미한
그런 결정체인 '나'
과거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과거를 잡을 수 없고
나아가 찾을 수조차 없기 때문에
외면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은 없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
오늘을 소중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
또 한편으로는 오늘이 무서운 이유
덧)
자신도 모르는 자신을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탐구해 가는 주인공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살아나는 기억
어쩌면 우리가 누구인지는
내가 아니라 수많은 그들이 결정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내가 누구로 보이고 싶은지를 결정하면
수많은 그들이 그렇게 보게 되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