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고돈쓰고 Aug 23. 2021

바이올린으로 호사를 누리다

어느 비 오는 날, 그래 오늘처럼 여름과 가을의 경계랍시고 아침에 호우로 시작하여 결국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로 하루를 채운 날이었지. 물론 나도 한국 사람 아니랄까 봐 그날 먹을거리로는 부침개를 생각했어. 재료가 제법 들어가는 해물파전이면 더 좋고, 그 따끈한 밀가루 범벅이 뭐라고 오천만 국민 중 사천구백만은 아마 이 메뉴가 떠올랐을 거야. 나머지 백만은... 뭐랄까, 하필 어제 먹었기에 대신 라면을 떠올렸을지도 모르지. 비 오는 날엔 라면도 만만치 않아. 그날 난 널따랗고 두터운 해물파전을 먹고 난 후 올라오는 느끼함에 당연히 신라면으로 입가심을 했으니까.


밥상 위에 남은 덩그렇게 빈 접시와 기름기 둥둥 뜬 간장종지만이 내 빵그래진 배를 말없이 설명해 주었어. 곧이어 라면 봉지 뜯을 때 난 소리는 배가 터질 것 같음을 호소해 주었고. 결국 라면까지 해치웠어도 다행히 배는 무사했지만 밀려오는 후회는 어쩔 수 없었어. 빨리 자기변명으로 달래야 했단다. 그래 천고마비의 계절? 그건 말이 살찌는 거고... 에라 모르겠다, 매운맛에 얼얼해진 입안이나 달래야겠다 싶어 냉장고에서 하나 남은 부라보콘을 꺼냈어. 자기변명은 무슨, 반항한 거지. 밖에 비바람 불잖아. 질풍노도


결국 앉아 있기도 힘들었어. 빨리 중력의 힘을 빌려서라도 위에서 장으로 먹은 게 이동하길 바랐던 거야. 그냥 서 있었었어. 해물파전 두 장에 간간이 먹은 파김치 그리고 떡라면에 삶은 계란, 아이스크림까지 먹은 걸 하나하나 복기하니까 가만히 서있는 것도 부족하단 생각이 들더라구. 그래서 걸었어. 비가 오니 밖에 나가긴 그렇고 집안이래봤자 현관문에서 베란다까지 열몇 발짝 남짓이지만 왔다 갔다 하며 계속 걸었지. 천천히... 베란다를 향할 땐 부슬부슬 비 내리는 초가을의 정취를 창문 너머 느꼈고 다시 뒤돌아 현관문을 향할 때에는 미처 꺼지지 않은 센서등이 어둑한 집안을 비추는 무드등으로 보였어.


소요학파라고 들어봤어? 왜 아리스토텔레스가 산책길을 이리저리 거닐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잖아. 발바닥으로 흙길을 다지듯 생각을 다듬기에 좋았나 봐. 칸트도 산책을 좋아했었고 소식까지 했다는데 이거 완전히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현대판 버전이네. 나도 배부른 돼지에서 사색하는 레벨로 업글된 것 같았어. 역시 인간은 생각을 해야 돼. 배보다 머리가 왜 위에 있겠어? 형이상학은 두발로 걷는 종족들의 크나큰 결실이야. 게다가 두 손까지 자유로우니. 이런저런 생각에 문뜩 걷는다는 것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네.


좀 있으니 배도 점점 꺼지고 반쯤 열려있는 베란다 창을 통해 선선한 비바람이, 어라? 봄바람의 산뜻함보다 더 무게감 있게 다가왔어. 사색에서 감성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지. 마침 방 한구석에 오도카니 놓여있는 바이올린 케이스가 눈에 들어오더라구. 열어달라는 것 같기도 하고. 열어주면 뭐, 설마 내 실력에 지금 어쩌라고? 그래도 열어줬어. 열기만 했겠어? 연 김에 습관대로 바이올린을 집어 들고 받침대 끼우고 활 조이고... 아 이럴 땐 뚜껑만 열면 바로 스탠바이 되는 피아노면 얼마나 좋겠냐. 잠시 이것저것 챙긴 다음, 그래 그날만큼은 왠지 평소와는 다르게 연습이 아닌 연주하는 마음으로 바이올린을 켰어. 비발디의 ‘라르고’였지


라르고라 느리지만 쉬프트가 난무하고 하이포지션에 트릴까지, 만만치 않았어. 평소 연습할 때도 음정 맞추기가 힘들었지. 느린곡일수록 더 어렵다고 했던가. 그런데 그날따라 그 곡이 듣고 싶었던 거야. 날씨에 딱이라고 생각했나 봐. 비는 추적이고 시나브로 어두워지기까지 하니 왠지 우울모드가 되더라고. 근데 말이다, 소리가 듣고 싶어서 연주한 건데 끝나고 나서 깨달았어. 연주로 내는 음보다 연주하는 행위 자체가 나에게 행복감을 주었다는걸. 걷느라고 자유로왔던 두 손으로 뭔가를 했다는 거 말이야. 마치 사색 위에 하나를 더 얹은 것 같은 뿌듯함이랄까. 철학 위에 예술이었나? 고등학교 때 어떻게 배웠는지 기억이 안 나네. 여하튼 밥 먹고 내내 앉아서는 보통 TV 보기 마련인데 일어나 걷기도 하고 바이올린까지 끼적거렸으니 덕분에 호사를 누렸다고 해야겠지? 게다가 그날의 감성을 소리로 (만)들었으니까. 너도 칼림바 배운다며, 적극 강추다.



<비발디-라르고>

[suzuki Vol.5]#2_Vivaldi Concerto in a minor_2nd mov. - YouTube





작가의 이전글 나뚜루 아이스크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