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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고돈쓰고 Feb 24. 2019

설문조사

휴일을 맞아 K는 오랜만에 밀린 책 좀 읽을까 해서 집을 나섰다. 집안은 덥고, 공공 도서관은 애어른 할 것 없이 북적거려 요즘 '열공' 분위기인 카페를 택하였다. 그냥 책 읽기에는 더없이 적합한 공간이다. 에어컨의 시원함과 은은한 커피향 그리고 약간의 시끌벅적함은 서로가 뒤섞이며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가 자신과 타인을 분리하면서 드러내기와 엿보기가 가능한 투명 장막이 된다. 그런 장막 안에서 K는 요즘 베스트셀러인 하루키의 소설을 펼쳐 보임으로 트렌드의 편입을 드러내고, 여기저기 흘러가는 시간들을 엿보기도 한다. 거기에는 연인이나 친구들이 함께하는 오늘의 소비가 있고 홀로 두툼한 책과 씨름하는 내일의 준비도 있다.

여름의 더위는 시원함을 갈망하게 한다. 그래서인지 겨울의 차분함과 달리 사람들의 몸놀림은 활기차다. 따뜻함과 시원함, 둘 중에 어느 것이 좋으냐고 물어본다면 대체로 활기찬 사람들은 시원함을 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카페는 추울 정도로 시원했다.

'창가 테이블 자리에서 혼자 문고판 책을 읽으면서 밥을 먹는데 갑자기 맞은편에 젊은 여자가 와서 앉았다. 여자는 전혀 주저하는 기색 없이, 한마디 양해도 구하지 않고 의자의 비닐시트 위에 털썩 앉았다. 마치 세상에서 이보다 당연한 일은 없다는 것처럼.'(『기사단장 죽이기1』 중에서)

잠시 책갈피 속 활자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어떤 여자가 K 옆을 지나면서 자신의 가방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잔을 치고 말았다. 활달한 발걸음이 가방까지 출렁거리게 했나 보다. 몇 모금 마시지 못했었기에 쏟아진 커피는 테이블과 바닥에 흥건했다. 다닥다닥 붙은 자리 배치로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지 직원은 재빨리 대걸레로 바닥을 훔쳤다.

  "죄송해서 어쩌지요, 어디 옷에 튀지는 않았나요?"
  "아, 괜찮아요, 커피를 다 쏟았네"
  
읽고있던 책에 몇 방울 커피가 튄 것 말고는 괜찮았다. 그것을 확인한 여자는 다소 안심했는지 얼굴에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제가 다시 한 잔 뽑아 드릴게요, 카페라테인 것 같은데...”
  "아, 네..."

K는 '아이스'라고 말할까 했는데 여자는 겅중겅중 벌써 주문하러 카운터로 가버렸다. 잠시 후 여자는 내 맘을 알아챈 듯 손에는 아이스 카페라테와 다른 한 손에는 조각 케이크를 들고 가방을 둘러멘 채 조금 전 커피잔을 쳤을 때의 그 활기참으로 걸어왔다. 마치 손이 하나 더 있었으면 거기에도 뭔가 들고 있을 것 같은 기세였다. 케이크에다 한 사이즈 더 커진 '아이스'커피를 본 K는, 그것들을 자신에 대한 호감으로 해석했는지 그녀에게 잠깐 앉으라고 말할 뻔했다. 신속한 사고 수습과 깔끔한 사후 처리가 오히려 K의 호감을 샀다. 보통 여자 같으면 미안하단 말과 함께 커피까지는 글쎄, 요즘은 말로만 '발라 때우는' 시대가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여자는 한창때 나이를 지났음이 보였다. 한 듯 안 한 듯 옅게 화장한 얼굴에 30대 초중반의 나이가 얼핏 스쳤다. 그 성숙함이 수려한 매너를 뽑아낸 것일까. 스키니 타입의 청바지에 하얀색 블라우스 차림은 평범한 옷차림이었지만 가슴 부위 옷깃에 걸친 검정색 선글라스는 하얀색 바탕에 포인트가 되어 멋스러움을 자아냈다. 그렇게 그녀는 K의 일상에도 포인트를 찍었다.  

  "무슨 케이크까지, 이렇게 안 해도 되는데... 제가 미안해지네요"
  "아니에요, 책 읽다 놀라셨을 텐데요.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자~알 먹을게요"
  "넵! 저어, 근데요..."

여자는 망설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입안에 사탕 굴리듯 할 말들을 적절히 다듬고 있는 모양새다. 그녀는 K의 호기심을 충분히 자극하고도 남을 시간쯤 머뭇거렸다. 잠시 잠깐의 그 호기심이 답답함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여자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리고 K의 투명 장막을 찢고 들어왔다.

  "잠깐 앉아도 될까요."

우연일까. 소설 속의 젊은 여자가 지면 밖으로 튀어나왔다. 소설이 갑자기 현실이 되었다. 무턱대고 자리에 앉지 않은 것만 달랐을 뿐. K는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오히려 앉으라고 말할 뻔했던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걸 감추려는 듯 약간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실 빈자리가 없어서요. 혼자 오신 것 같아 여쭙는 겁니다."
  "아, 그래요? 저는 책 읽으러 왔으니까 괜찮아요. 불편할 것도 없고요."

내심 소설 같은 전개를 기대했는지, 단지 합석하자는 말에 적잖이 실망한 K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앞에 놓인 커피는 마셨으나 그녀가 사다 준 케이크는 합석에 대한 대가치고는 과분한 것 같아 먹기가 미안했다. 그녀는 무슨 전공서같은 두꺼운 책을 펴들고 이리저리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얼마 지났을까, 그녀는 탁자를 똑똑 두드려 K의 주의를 끌었다. 처음의 어색한 분위기가 가셔지고 점점 독서삼매에 빠져들 무렵이었는데, K는 또 뭔가 하는 귀찮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저어, 사실 제가 대학원생인데요... 전공은 심리학이고요, 논문 준비로 설문조사할게 있는데... 혹시 좀 도와주실 수 있나 해서요."

설문조사? 아니 이 여자가 처음부터 계획적이었나. 차츰차츰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는 폼새가 K를 불편하게 했다.

  "박사과정이세요?"
  "네, 졸업학기인데 이번에 통과를 해야 해서요, 좀 도와주세요."
  "자연과학엔 실험이듯이 사회과학엔 설문이겠죠, 논문 쓰는데 필요한 것이... 하하"

K는 자신도 논문 좀 써봤다는 걸 은근히 내세우며 아는 체를 하였다. "어머, 맞아요" 그녀의 격한 반응에 K는 흡족해하며 그녀가 건네준 설문지를 받았다. 제법 서너 장이나 되는 두툼한 종이 뭉치였다. 지문도 길어서 오래간만에 시험 보는 느낌으로 자세히 읽고 답하였다. 성인 심리학 중 ‘성 의식’에 관련한 내용이었는데 간혹 서술형도 있었다. 하나하나 항목을 체크해 가는데 K는 얼굴이 점점 뜨거워짐을 느꼈다. 혼전 섹스의 유무를 시작으로 그렇다면 몇 명의 이성과 관계했으며 혼외정사 경험까지 있는지 비교적 자세히 물어보는 항목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테이블 너머로 그녀의 눈길이 느껴져서다. 그것은 여름철 태양만큼이나 강렬하면서도 기습적 폭우처럼 도발적이었다. 뭔가 야릇한 분위기로 이끌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익숙지 않음에서 오는 어색함이 왠지 불안했다.

  "익명이니까 안심하고 솔직히 써주시면 돼요. 어디까지나 설문이니까요, 호호호"

분위기도 그렇고 그녀의 격려(?)가 K를 자극하여 설문에 충실하게 하였다. K는 소영을 생각했다. 설계사무소 직원인 그녀는 K와 프로젝트를 같이 하면서 알게 된 여자다. 밤샘 근무가 잦은 일의 특성상 둘은 자연히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끔 만나면서 사랑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젊은 여자의 육체를 탐하는 시간만큼은 그에게 젊음이고 해방이었다. K는 혼외정사란에 동그라미를 쳤다. 권태기의 아내한테는 얻을 수 없는 만족감, 아니 활력이라고 규정하여 스스로 죄책감을 반감하려 했다. 활기차게 일해서 얻은 성취감을 아내 손에 현금화한다는 논리로 변명하고 싶었다. 어젯밤에 느꼈던 소영의 뜨거운 숨결과 부드러운 손길을 K는 고스란히 설문지에 옮겼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 저는 바빠서 이만. 아, 여기 케이크 좀 드세요."

그녀는 소매치기하듯 설문지를 낚아채서 가방에 넣고 휑하니 사라졌다. 두꺼운 전공서만큼이나 오래 앉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케이크 좀 드시라는 마지막 말이, 이젠 케이크 값했으니 먹어도 된다는 식으로 들렸다. 주변은 여전히 시끌벅적했지만 그녀의 빈자리엔 적막감이 들었다. 잠시 어떨떨 했지만 K는 다시 하루키에 빠져들었고 커피와 케이크는 조금씩 줄어들었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K는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였고 그래도 배가 고팠는지 가방을 챙겨서 집으로 향했다. 밀린 집안일한답시고 휴일임에도 K를 밖으로 내몰았던 아내는 지금쯤 분주히 저녁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K는 깨끗이 정돈된 집에서 정성껏 차려진 식탁을 기대하며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나 왔어. 배고파 밥 줘."

집으로 들어온 K는 왠지 이상했다. 반짝반짝 윤기를 기대했던 마룻바닥은 아침보다 더 어지럽혀져 있었고 식탁 위에는 검은 반점뿐인 바나나와 먹다 남은 우유 컵만 뎅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 옆의 누런 서류봉투가 눈에 띄었다. 아내는 방에서 자는지 나와 보지도 않았다. K는 서류봉투를 열어보았다. 내용물을 꺼내 본 순간 흠칫했다. 이혼서류였다. 그리고 소영과 함께 모텔에 들어가는 장면의 사진도 몇 장 들어 있었다. 이혼서류에는 이미 아내의 도장이 선명했다. K는 변명이라도 해보려고 아내를 찾았으나 집안엔 아무도 없었다. 소파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리려는데 탁자 위에 아내의 쪽지가 보였다. K는 급한 맘으로 훑어보았다.

  '마음까지 외도할 줄은 몰랐어요. 설문지를 보기 전까지는...'

그리고 옆에는 익명의 설문지가 칼이 되어 자신을 찌르고 있었다.

  - 당신은 배우자 외에 애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예(○),     아니오(   ),    생각해본 적이 없다(   )
  - 당신은 배우자와 관계 시 애인을 떠올린 적 있나요?
    예(○),     아니오(   ),    생각해본 적이 없다(   )
  - 당신은 배우자보다 애인에게 더 사랑을 느낀 적이 있나요?
    예(○),     아니오(   ),    생각해본 적이 없다(   )
  - 당신은 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할 수 있나요?
    예(   ),     아니오(○),    생각해본 적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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