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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답정킴 Oct 12. 2020

나와 맞지 않은 상담 선생님 1

내가 이번에 선택한 선생님은 모교에서 상담을 가르치는 교수님이었다.

내가 다니던 모교의 분위기도 잘 알고 있었고, 

거기에 교수님이라는 타이틀 또한 신뢰를 주었다.

또한 종교의 문제가 있다보니 종교가 있는 교수님의 조언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집 근처에 있는 상담센터였는데, 아담하지만 아늑했다. 

어두운 조명에 푹신한 쇼파가 마주 보고 있었고, 

사이에 있는 테이블에는 티슈가 놓여져 있었다. 

그 티슈에 내 지분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꽤 많은 양의 티슈를 사용했다. 


상담할 교수님은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분이었고, 차분하셨다.

내 맞은 편 쇼파에 앉아서 이야기를 잘 들어주셨고, 또 잘 들어주셨다.

매번 그렇게 한탄하고 한바탕 울고 나면 집에 갈 시간이었다.

 

아무것도 나아지는 것이 없는데, 그냥 울기 위해 아니면

지푸라기라도 잡기 위해 나가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나아지는 것 없이 상담을 다녔다.

날 맡은 상담 선생님은 세미나로 바빴고, 몇 번은 타선생님으로 대체되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처음부터 내 얘기를 다시 시작해야 했다. 

어디서부터 다시 말해야할지, 어떻게 말해야할지 모른 채로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고싶은 말이 산더미였지만, 처음부터 이야기해야하는 게 괴로웠다. 

그래도 나는 울어야 했고, 말해야 했다.


그래서 상담 선생님이 바뀐 상태에도 찾아가서 울고 불었다.

매일이 불바다를 맨발로 딛고 서는 기분이었다.

발을 얼른 떼내지 않으면 온 몸에 불길이 타올라 버릴 것만 같았다.

매주 한 번의 상담은 그나마 그 달궈진 발을 잠시 뉘일 곳이었다.




너무 바빠서 환자보다 자기 일이 먼저인 상담사는 거른다.


사실 이렇게 상담 선생님이 중간에 바뀌는 일은 흔하지 않다.

상담의 특성상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이렇게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러나 나는 그런 상황 같은 건 안중에 둘 수 없었다.


그 교수님은 공사가 다망하셔서 세미나를 가시거나

종종 내가 울고 불며 이야기할 때에도 하품을 하셨다.

그런 태도가 나를 그 선생님을 믿고 의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내 고민이 그 선생님께는 한낱 먼지같았다. 

거절당해서 찾아온 곳이 그렇게 나를 거절하고 있는 기분이랄까.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거주지가 달라지는 바람에 상담선생님을 바꾸게 되었다.


상담선생님께 거주지 주변의 상담선생님을 추천받았다.  

이번엔 젊은 여교수님이었다.

그분 오피스에 상담을 받으러 다녔다.

나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내 우울이나 불안이 많이 나아진 상태였고, 절절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하이톤의 목소리로 맞장구를 잘 쳐주셨다.

하지만 하이톤의 맞장구, 그리고 과한 표정은 왠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어쩌면 소개해준 상담 선생님에 대한 불신이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담은 10회기는 해봐야 한다는 통설 아래 조금 더 다녀보았다.

그리고 한두 달쯤 다니다가 상담을 그만두었다.

 

모두가 가짜 같았다.

8-10만 원 가까이의 돈을 매회 내면서 이 돈의 가치를 하는 것인지 의아했다.

두 달의 과정이 끝나고 구멍 난 잔고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더 이상 상담이 나를 낫게 해 줄  것이라는 것을, 상담 자체를 신뢰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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