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울 엄마

- 젊고 팔팔했던 시간을 찾고 싶다.

by 정상이

비가 내리고 있다.

어제저녁엔 쏟아지듯 내렸다.


어릴 적 비 오는 날이면 엄마는 수제비를 하기도 하고, 밀가루를 둥글게 반죽하여 상 위에 펼쳐 놓고 두 개씩 포개어 잘라 다시 펼치면 칼국수가 되었다. 엄마가 해 주는 건 뭐든 맛있었다. 그만큼 엄마는 솜씨가 좋았다. 그 솜씨를 나는 가지지 못했다. 엄마의 솜씨를 여동생이나 막내 동생이 조금 가진 것 같기는 하다. 나는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나 완성되었을 때 느끼는 희열이 별로 없다. 누군가 뚝딱 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아쉽게도 아직 도깨비방망이를 가지지 못했다. 나의 도깨비방망이인 엄마, 울 엄마는 지금 아프다.


엄마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울 엄마는 어떤 사람인가.

엄마는 6남매의 첫째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가 엄마의 이름을 지어올 때 밥 굶지 않는 이름으로 지었다. 밥 굶지 않는 건 가난하게 살지 않는다는 것인데 엄마는 어떠했나.


경찰공무원인 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하고, 우리를 낳아 길렀지만 돈 때문에 힘든 시간이 꽤 되었다.

아버지가 5남매의 셋째였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고, 두 삼촌의 뒷바라지까지 해야 했기에 늘 돈에 쪼들리며 살았다. 두 동생의 공부에 결혼까지 책임졌지만 돌아오는 건 없었다.


엄마는 외할머니 보다 외할아버지를 더 좋아했다. 외할아버지는 점잖고 말이 없고 큰 소리를 내지 않는 분이었다. 반면 아버지는 뭐만 하면 소리치고, 자신의 뜻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엄마는 더 외할아버지가 그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엄마는 현재 보다 과거에 자주 머물고 과거의 얘기를 하는데 주로 외할아버지에 대한 얘기가 많다. 어쩌면 첫째 딸이라 각별했을 수도 있다. 외할아버지는 입이 까다로웠다. 엄마도 그렇다. 냄새에 예민하고 입에 맞지 않으면 절대 먹지 않는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음식 때문에 엄청 힘들었다. 엄마도 자신의 까다로운 입맛을 알고 있지만, 안다고 고쳐지지는 않는다.


엄마는 시골에 살았고, 시골로 시집을 왔지만 항상 화장을 하면서 자신을 가꾸었다. 피부가 원래 하얀 편이었기에 화장을 하지 않으면 잘 탔다. 패션이나 미용에 신경을 많이 썼다. 밭이나 논에 일하러 갈 때에도 곱게 화장을 했다. 보통 시골 아줌마들은 그러지 않다 보니 엄마의 그런 모습이 눈에 띄기도 했다.


나는 젊고 멋지게 꾸민 엄마가 좋았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엄마가 학교에 오면 그렇게 신날 수 없었다. 엄마는 곱게 화장을 하고 한복이나 양장을 멋지게 하여 왔기에 더 뿌듯했던 것 같다.


봐라 울 엄마야. 멋지지?


엄마는 할머니(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았다. 고부간의 갈등이 없었다. 아버지와 엄마는 교육관이 서로 맞아서 우리 앞에서 부부싸움을 하지 않았다. 두 분이 다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아버지는 권위적이고 무서웠지만 나름 합리적인 부분이 있었다.


엄마는 하고 싶은 것이 꽤 있었지만 아버지로 인해하지 못한 것이 꽤 된다. 그중에서 운전면허증을 따지 못하게 하여 지금까지 후회하고 있다. 아버지는 경찰공무원으로 있었기에 여러 가지 사건 사고를 접하다 보니 엄마가 운전하는 걸 원치 않았다. 엄마는 운전을 하면서 자유롭게 어디든 다니고 싶었는데 아버지 때문에 좌절되었다. 아버지는 어디든 자신이 데려다준다고 하지만 그건 배려가 아니라 구속이었다.


나에게 엄마는 좋은 친구였다. 어떤 일이든 함께 얘기하고 의논하는 상대였다. 엄마는 나에게 뭔가를 강요한 적이 없다. 중학교 3학년 때, 고등학교 시험에 떨어졌을 때에도 돈을 주면서 친구들과 가서 놀다 오라며 위로해 주었다. 이미 좌절과 시험에 떨어진 것에 대한 실망감이 느끼고 있음을 알고 있는 나에게 왜 떨어졌냐고 나무라지 않았다. 엄마가 준 돈으로 친구들과 뭔가를 하며 놀았는데 뭘 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다만 그렇게 나를 위로해 주는 엄마가 고마웠다.


내가 자라면서 우리 집이 힘든 시기는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중학교 1학년 때였고, 또 한 번은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하시던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하여 망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중학생이 나 하나였기에 체감하지는 못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이미 동생들까지 중학생에 고등학생 둘이었기에 아버지 혼자 벌기엔 벅찼다. 그래서 엄마도 식품회사에 들어가 일을 해야 했다. 아침에 우리들 도시락과 엄마 도시락까지 싸서 출근해야 했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라 도시락을 두 개 싸야 했다. 나는 밥을 천천히 먹다 보니 매번 반찬이 동이 나서 반찬통이 한 개 더 필요했다. 엄마는 그걸 해 주었다. 아마 나라면 못했을 것이다.

어느 날 아침에 도시락을 챙기다가 본 광경을 잊을 수 없다. 부엌에 펼쳐져 있던 도시락들. 정확한 개수는 모르겠지만 아마 일곱 개였던 걸로 기억한다. 매일 그 많은 도시락을 쌌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엄마는 밝고 붙임성이 좋고 사람들을 좋아한다. 주위에 친구가 많다. 뭐든 많이 만들어 나누어 준다.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우리 집은 슈퍼마켓을 했다. 그때 엄마의 사교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우리 집과 맞은편에 슈퍼마켓이 하나 더 있었지만 우리 집에 손님이 더 많았다. 자취생들이나 신혼부부들에게 반찬이나 야채를 아낌없이 제공했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엄마 덕분에 우리 가게로 더 많이 왔다.

엄마는 슈퍼마켓을 하기 전부터 장사를 하고 싶어 했다. 가게를 하면서 소원을 이루었지만 엄마는 가게에 매여있는 게 갑갑하여 매번 할머니나 우리들을 가게에 맞기는 일이 잦았다. 한 5년이나 6년 정도하고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


엄마가 갱년기를 맞았을 때 우리는 곁에 없었다. 모두 집을 떠나 객지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힘듦을 몰랐다. 엄마는 갱년기를 힘들게 보냈다.


우리 4남매가 결혼을 하고 엄마가 회갑을 맞이했을 때 크게 잔치를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엄마가 마다했다. 자잘하게 아프기 시작하면서 일을 크게 벌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우리는 오랜만에 가족사진을 찍고 식당에서 이모들을 모시고 함께 밥을 먹었다.


엄마는 2년이나 1년 주기로 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하는 일이 잦았다. 우리는 그게 엄마가 우리에게 바라는 관심이라고 여겼다. 시간이 나면 엄마에게 가서 말벗을 해 주었지만 엄마에겐 부족했을 수도 있다.


골골하는 사람이 더 오래 산다는 말처럼 엄마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잊을 만하면 병원에 입원을 했지만 심각하지는 않았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현재 엄마의 모습으로 있게 된 결정타는 우선 심각한 변비였다. 너무 심해서 약으로도 되지 않았다. 결국 대장으로 내시경을 두 번이나 해야 했다. 두 번의 마취. 연로한 엄마에겐 힘든 일이었다. 변비는 해결되었지만 그때 몸무게가 많이 빠졌다.

그러다가 앉았다가 일어서면서 대퇴부에 골절이 생겼다. 이 수술로 걷는 게 힘들어졌다. 그전에는 혼자서 산책을 많이 했다. 물론 중간에 넘어져서 혼자 못 일어나 몇 번이나 우리가 달려가야 했지만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대퇴부 수술 후 엄마는 걷는 게 자유롭지 않게 되었고 뇌에도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

감기로 당뇨 약을 먹지 않으면서 쇼크가 오고, 뇌경색도 왔다.


당뇨, 혈압, 신장기능 저하, 치매, 골다공증으로 인한 뼈 약화로 몸무게가 50킬로를 왔다 갔다 한다.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이 앉거나 걸어 다니는 시간보다 길다.


내가 알고 있었던 엄마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 내 엄마를 찾고 싶다. 그러나 그럴 확률은 떨어진다.

젊었던 내 엄마는 세월로, 병으로 늙어가고 약해지고 있다.

나 역시 늙어가고 약해지고 있다. 이게 삶이라고 생각하니 서글프다.

건강하게 살다가 건강하게 죽는 게 참 쉽지 않음을 느끼고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작은 아들의 고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