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 결제 금액 알림이 왔다.
어? 병원이네. 큰 애가 병원에 간 모양이다. 아프다는 말이 없었는데. 전화를 했다.
어디가 안 좋아?
어. 어제 체육관에 있는데 속이 메슥거리고 머리도 아팠는데 아침에 여전해서 병원에 왔어.
뭐라는데?
탈수에 탈진에다가 장염증상도 있다고 하네.
링거 하나 맞아라 하지 않더나?
그렇게 말하는데 그냥 왔어. 집에서 쉬면 되겠지.
그래, 죽 사 가지고 갈게 쉬어라.
한 여름인데 체중을 줄인다고 한 끼 먹으며 심하게 운동을 하더니……. 헹하니 마른 아이의 얼굴을 보니 안쓰러웠다. 죽을 먹고, 약을 먹고 쉬었다. 이렇게 아프니 낮에 볼 수 있네. 헛웃음이 났다. 괜찮아야 할 텐데. 큰 애는 잘 아프지 않은데 어쩌다 아프면 심하게 아픈 경향이 있다. 4살 때 폐렴증상이 있어서 병원에 일주일 입원을 했었고, 중학교 3학년 때에도 일주일 입원 했었다.
아픈 아이를 가만 보고 있으니 아이의 어릴 적 일이 생각났다.
큰 애는 학교에서나 친구들 간의 문제가 생겨도 말을 하지 않는다.
말을 하는 시점은 사건이 일어나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이다. 그러니 정작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아이의 행동만 보이고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학교 준비물로 걸레를 만들어 오라고 했다. 헌 옷을 모아서 걸레를 만들었는데 챙겨가야 하는 날 보다 하루 늦게 가져갔다. 준비가 늦은 애들은 단체로 불려 나가서 손바닥을 맞았다. 하루 늦게 가져갔다고 애들에게 손바닥을 때리다니 나는 화가 나고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그렇게 며칠 지난 어느 날, 아이가 학교를 가지 않으려고 했다. 배가 아프다고 해서 병원에 데리고 갔다. 선생님께는 문자로 상황을 알렸다. 병원에서는 대장 초음파를 해 보더니 심한 건 아니고 약간 예민한 상태라고 했다. 문제는 다음날도 또 그다음 날도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아이의 상태는 멀쩡했다.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학교에 결석을 하는데 담임 선생님은 전화 한 통 하지 않았고 내 문자에 답장 한 번 하지 않았다. 이상해서 담임 선생님에 대해 알아보았다. 아이들을 무섭게 잡는 선생님으로 알려져 있었다. 여태까지 학교 생활에서 큰 문제가 없었기에 큰 애의 행동은 당황스럽고 나를 힘들게 했다.
그러나 어쩌랴. 아이가 가기 싫다는 데 억지로 보낼 수는 없잖은가.
어찌해야 할지 당황스럽고 화가 나는 내 감정을 추슬러야 했다.
작은 애를 학교에 보내고 큰 애는 집에 있고, 나는 목욕탕으로 갔다.
목욕탕에서 내 마음을 가라앉히는 연습을 했다.
그렇게 4일을 결석하고 아이는 학교에 갔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학부모 참여 수업이 잡혔다. 나는 담임 선생님을 만나면 자세하고 얘기를 해 보리라 생각하고 갔다. 담인은 40대의 여성이었고 참여 수업 첫 시작에 이런 말을 했다.
“저는 학기 초에 아이들을 무섭게 잡습니다. 학습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 쉬는 시간에 노는 것도 하지 못하고 합니다. 학기 초에 잘 잡아야 한 학년이 수월하니까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아이들을 잡는다는 말을 학부모 앞에서 어찌 저렇게 당당하게 할 수 있지?
쉬는 시간에 놀지 못하게 한다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면 한창 뛰어놀 때이다.
그런 아이들을 교실에 앉혀 놓는다는 게 말이 되나.
나는 그날 담임과 면담을 하지 않았다. 벽창호와 얘기할 생각이 없었다. 왜 우리 애가 학교에 가지 않으려고 했는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다시 학교에 간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나는 손바닥을 친구들 앞에서 맞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었다. 우리 아이의 학교 생활이 얼마나 힘들지 걱정되었다.
그런데 며칠 후 아이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엄마, 우리 담임샘 아파서 병원에 가고 임시 샘이 왔어. 너무 좋아.”
아이가 좋아하니 나도 좋았다. 그러나 퇴원을 하면 다시 올 텐데 그땐 또 실망하겠지. 어쩌나. 그러나 그건 내 오산이었다. 문제의 담임 샘은 병원에 입원을 오래 했고, 퇴원과 동시에 퇴임을 했다. 너무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병이라는 게 참으로 얄궂다. 정신이 힘들면 몸으로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큰 애는 어쩌면 지금 몸 보다 마음이 더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이 원하는 큰 대회를 접었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접은 것이다.
누가 어찌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것이지만 마음은 힘들 것이다.
큰 대회에 나가서 당당하게 우승을 해 보고 마무리하는 것과 그렇지 못하는 건 큰 차이가 있다.
아이의 몸이 조금씩 회복되듯이 마음도 잘 추슬러서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기운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부모가 할 일은 그저 지켜보고,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게 쉽지는 않다. 그 어려운 걸 많은 부모들은 해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