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아하는 노래 멋지게 부르며 있기를~
엄마의 환갑 때 일이 생각난다.
뷔페에서 환갑잔치를 하려고 하니, 엄마의 몸이 그리 좋지 않다며 가족끼리 간단히 하자고 했다.
오랜만에 가족사진을 찍으며 부모님 영정사진도 같이 찍었다.
식당에 이모들을 초빙하고 우리 식구들은 모여 저녁을 먹었다. 엄마의 형제는 5남매이다. 사촌 이모들과 친하기 때문에 사촌 이모와 외삼촌까지 불러서 괜찮은 저녁을 먹었다.
엄마는 50대 중반에 급성 당뇨가 왔었다. 인천에 있는 이모가 주원인이었다. 이모에게 돈을 빌려 주었는데 사고를 치는 바람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여 온 당뇨였다. 나중에 돌려받기는 했지만 원금도 다 받지는 못한 걸로 알고 있다. 내가 인천이모를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엄마 병을 유발한 원인으로 작용하니 화가 났다.
갱년기가 왔을 때에도 우리는 곁에 없었다. 다들 멀리서 일을 해야 했기에 엄마 혼자 힘든 시간을 견뎌야 했다. 지금도 그게 너무 죄송하다.
혈압과 당뇨가 있었지만 엄마는 시간이 나면 강변을 걸었기에 나름대로 건강했다. 몇 년에 한 번씩 감기나 원인을 알 수 없는 병명으로 입원을 했지만 그리 큰 일은 아니었다. 코로나 때는 오히려 건강했다. 그 기간에는 병원 가는 일이 없었으니까.
아버지는 두 남동생과 여행을 떠난 적이 몇 번 있었다. 남자들끼리의 여행이었다.
엄마는 그게 부러웠던 모양이었다. 우리에게 가자고 했다. 여동생과 시간을 맞춰야 했다.
2021년 12월에 우리는 떠났다. 1박 2일의 일정으로 부산에 갔다.
기장 바닷가 주변에서 가리비를 먹고, 바다가 보이는 기차를 타고, 바닷가가 보이는 절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 달에 엄마 생신이 있었기에 셋이서 호텔방에서 생일 케이크를 자르고 단톡방에 올렸다.
그 여행이 엄마랑 함께 한 마지막 여행이 되었다.
엄마는 장이 약했다. 어느 날, 심한 변비로 응급실에 갔다가 입원을 하게 되었다. 약을 먹고, 관장을 해도 변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장내시경을 해야 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변이 나오고 회복되는 데 시간이 걸렸다. 2주일이 되어 갈 즈음 퇴원을 했다. 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하면서 연세에 비해 신체 나이가 10년은 더 늙었다는 결과가 나왔다.
아버지랑 산책을 나갔다가 일어서면서 골절이 오고, 대퇴부를 인공관절로 교체하는 수술을 했다. 그때 엄마의 몸무게가 10킬로 넘게 빠졌다. 뼈가 약하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비싼 주사를 맞아야 했다. 근 6개월을 맞았다. 퇴원을 하고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집에서 보조기구를 잡고 걸었다.
집안일이 엄마에서 아버지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청소와 세탁기 돌리기 등 기본적인 일을 다 해결해야 했다.
아버지가 감기에 걸리고, 감기가 엄마한테 옮겨지면서 엄마는 당뇨 약을 먹는 걸 잊어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대퇴부 수술 후 인지력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당뇨약을 먹지 않으면서 심한 쇼크가 왔다. 급히 응급실로 갔다. 대학병원에서 일주일 있으면서 쇼크가 가라앉았지만 섬망증상이 함께 와서 이대로 집으로 가기엔 무리였다. 그때 엄마의 신장기능이 나쁘다는 걸 알았다. 일단 요양병원에서 엄마를 돌보기로 했다. 한 달 정도 있으니 섬망증상은 나아졌고 조금씩 회복되었다.
집으로 오면서 매일 요양보호사의 방문을 받았다. 하루 세 시간이었지만 엄마의 말동무가 되어 드리고, 엄마가 필요한 것을 챙겨 주었다.
엄마 스스로 약을 챙기지 못하니 아버지가 해야 했다. 그때부터 응급실과 입원을 반복하게 되는 생활의 시작이었다. 입원은 길게는 2주일, 짧게는 3일로 끝나기도 했다. 하루 이틀의 입원은 괜찮았지만 길어지면서 간병인을 두어야 했다. 총 세 번의 간병인을 두었다. 세 번 다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어떨 때는 병원비 보다 간병인 비가 더 많을 때도 있었다. 지난 설날 전후로 해서 입원했을 때는 간병인 구하기가 힘들었다. 휴일에는 휴일 수당을 줘야 했다.
지난 8월에 엄마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연락을 받고 응급을 불렀다. 병원을 갔더니 투석을 해야 한다고 했다. 투석과 연명치료는 하지 않기로 했기에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퇴원시켰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엄마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물도 넘기기 힘들어했다. 집에서 돌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버지 집에서 제일 가까운 요양병원으로 갔다.
그렇게 한 달이 조금 되기 전에 병원에서 상태가 나쁘다는 전화를 받기를 몇 번, 끝내 엄마는 돌아가셨다. 2025년 9월 22일 오후 1시 43분.
부모님은 몇 년 전에 시신기증에 사인을 했다. 경상대학교 병원에서 엄마의 시신을 가져갈 예정이었다. 우리는 엄마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준비해 두었다.
선산에 “주목나무”를 새로 심으면서 머리카락과 손톱을 함께 묻었다.
주목나무는 천년을 사는 신성한 나무라고 한다.
그렇게 엄마는 나무로 돌아갔다.
나무의 크기는 내 키 높이 정도 되었다.
이제 내 곁에 엄마는 없다.
그러나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엄마를 잃은 슬픔이 날 찾아오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