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날이 화창하니 좋더니 오늘은 구름이 끼면서 어두워지고 있다.
단풍이 조금씩 물들고 있기는 하다.
황보름의 에세이 ‘이 정도 거리가 딱 좋다(뜻밖, 2020)’를 읽고 있는데, 탈브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도 브라를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이고 가급적 탈브라를 하고 싶은 사람이다.
내 가슴은 여성들 평균에 비해 작다.
중학교 때 가슴이 커지기 시작하면서 브라를 하게 되었고, 우리는 갑갑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는 브라를 하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분위기가 그래서 어찌할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브라의 와이어가 불편하기 시작했다. 와이어로 사용되고 있는 쇠가 삐죽하니 나와서 살을 찌르는 경우도 있었다. 와이어가 나오지 못하게 실로 잘 여미었지만 잊을만하면 나와서 살을 찔렀다. 참다가 화가 나서 브라를 벗어서 삐죽 나온 부분을 왕창 빼 버렸다.
지금은 와이어가 없는 브라가 일반화되어 있고, 부드러운 재질로 만들어진 게 많지만 그때는 없었다.
와이어를 빼고 다녔다. 그전보다 편하고 좋았다.
그때부터 나는 브래지어를 사면 맨 먼저 와이어를 뺐다.
겨울에는 브라를 하지 않은 상태로 지내기가 편하다. 두꺼운 옷이 가려주니까. 그러나 여름에는 옷이 얇으니 한계가 있었다.
아이가 서너 살 되었을 때였을 것이다.
외출할 때는 할 수 없지만 집에서는 가급적 브라를 하지 않고 지냈는데 가까이 슈퍼에 가야 할 때는 약간 망설여졌다. 옷이 얇아서 젖꼭지가 보일까 봐 불안했다.
왜 사회는 우리의 가슴에 그토록 예민하게 굴었을까.
젖꼭지를 일부러 보이게 하는 것도 아닌데 꽁꽁 싸매고 다니게 했을까.
젖꼭지가 보이면 또 어떤가.
그걸 보고 성욕을 느낀 사람이 문제이지 우리가 문제는 아니잖는가.
아무튼 브라를 하기는 싫고 그냥 가는 것도 꺼려져 고민을 하다 내가 내린 대책은 밴드였다.
대일밴드를 꺼내어 꼭지에 붙였다.
옷이 얇아도 젖꼭지가 도드라져 보이지 않으니 브라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기분 좋게 슈퍼에 다녀왔다.
그러다 우연찮게 아이가 젖꼭지에 붙인 밴드를 보게 되었다.
“엄마, 어디 아파?”
“아니.”
“밴드는 왜 붙였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난감했다. 그때 뭐라고 했는지 솔직히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게 넘어갔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아이가 뜬금없이 물었다.
“엄마, 밴드 했어?”
“어? 뭔 밴드?”
“젖꼭지에 밴드 하잖아.”
하필 그 얘기를 한 곳이 엄마집에서 다 같이 모여 있을 때였다.
아이의 질문에 상황을 설명하고,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아이는 한동안 내가 밴드를 했는지에 관심을 주었다.
엄마가 밴드 한 모양새가 계속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아이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는 게 걸려서 더는 하지 않았다.
예전에 비해 많은 여성들은 탈브라를 하고 있다.
나는 출근이나 공식적인 자리를 제외하고 거의 하지 않는다.
집에 오면 벗기 바쁘다.
코르셋에서부터 거들, 브래지어까지 온통 몸을 조이는 물건들이다.
여성의 몸을 아름답게 한다는 명분으로, 몸매를 곡선으로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들이다.
정작 이런 것들을 착용하면 얼마나 힘들고 갑갑한지 알고 있을까.
여성의 몸은 보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존재해야 함을 알고 이제는 바뀌고 있고, 더 많이 바뀌어야 한다.
지금의 아이들은 어떨까. 브래지어를 순전히 자신의 선택으로 착용하고 있을까. 우리는 아직도 그들에게 뭔가를 강요하고 있지는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