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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상이 Feb 04. 2023

마르고 급하지만 정이 많았던 나의 고모!

 

 나에게 고모는 한 분뿐이다. 할머니는 5남매를 두었다. 첫째가 고모였고 둘째는 큰아버지, 셋째는 아버지, 넷째와 막내는 삼촌들이다. 


 고모는 할머니를 아주 많이 닮았다. 키가 컸고 얼굴이 약간 길쭉한 편이고 마른 체형을 지녔다. 고모와 할머니는 외형만 닮았다. 고모의 성격은 할아버지 그 자체였다. 뭐든 일이 주어지면 완벽하게 해 내려고 하고, 급했다. 누군가의 도움보다 혼자서 다 하려고 했다. 

 고모는 똑똑했다. 당시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가려고 했지만 딸이라는 이유로, 동생들이 많다는 이유로, 가정형편이 어렵다는 이유로 가지 못했다. 똑똑한 고모는 스스로 모든 걸 배우고 익혔다. 고모는 한자를 잘 썼고 모르는 것이 없었다. 만약 고모가 좀 더 배웠다면 굉장한 인물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건 맞는 말이다. 고모는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아는 사람이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혼자 다 익혔기에 다른 사람에게 절대 기죽지 않았다. 

 진주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결혼으로 서울에서 살았다. 낯선 곳이라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고모는 서울말을 익히며 아이들을 키웠다. 고모부는 조용하고 섬세한 분이셨지만 다정다감하지는 않았다. 아니, 우리에게는 다정하고 자상한 분이셨다. 내 눈에 보이는 두 분은 그리 다정하게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고모나 고모부의 말투가 거세고 투박하여 그렇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서울에 사는 고모는 조카인 우리들을 자주 불렀다. 당시 진주에서 서울까지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멀미가 심한 나는 버스를 타기만 하면 토하기에 차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고모댁은 가고 싶었고 여러 번 갔다. 그래서 서울이 낯설거나 두려운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고모는 우선, 큰 대야에 물을 담아 놓고 나를 씻겨줄 때 때수건으로 너무 아프게 하여 피부가 벌겋게 될 정도로 씻는 분이다. 다시는 고모랑 목욕을 하고 싶지 않다고 느꼈다. 엄마랑 목욕탕에 가서 내가 아프다고 하면 살살했는데 고모는 내 말은 깡 거리 무시하고 자신의 의지와 생각대로 했다. 

 고모는 음식 솜씨가 좋았다. 못하는 게 없었다. 만두도 뚝딱뚝딱 혼자 다 해 내셨다. 고모집에서 자주 먹었던 김치만두와 고기만두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닭볶음탕이나 고등어조림도 맛있었다. 고모가 만드는 음식은 다 특별하고 좋았다. 직장생활을 하느라 고모집에서 지낼 때 점심 도시락을 싸주셨다. 도시락 반찬은 매일 달랐고 맛있었다. 자신의 자식이 아닌 조카의 도시락을 싸 주는 고모는 아마 흔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만약 그때의 고모였다면, “야 니가 지금 몇 살이고? 스무 살이 되었으면 니 도시락은 니가 싸야지.”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고모는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철없던 나는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한 번도 그런 고모에게 감사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못했다. 왜 나는 그때 그런 말을 못 했을까. 고모의 사랑을 느끼고 고마운 마음은 있었지만 표현을 하지 못한 게 지금도 너무 안타깝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나는 편도선이 자주 아팠고 약을 달고 살았다. 그때는 의약분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때라서 목에 편도선이 올라오고 아프면 약국에 가서 약을 지었다. 며칠 먹으면 가라앉았다. 그러나 가끔 잘 낫지 않을 때도 있었다. 어느 날, 목에 편도선이 심하게 부어 아팠다. 편도선이 올라오면 열이 나고 입맛이 떨어지고 심하면 몸살도 온다. 그런 나를 위해 고모는 집에서 키우는 알로에를 잘라 즙을 짜서 내 목에 넣어 주었다. 그렇게 며칠 먹고 나니 좋아졌다. 편도선으로 음식을 잘 넘기지 못할 때 고모는 흰 죽을 주었다. 부드럽고 끈적하면서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고모는 부지런했다. 잠시의 시간도 허비하지 않았다. 고모는 항상 뭔가를 하고, 뭔가를 하느라 분주하고 바빴다. 쉬는 순간을 잘 보지 못했다. 고모집에서 지내다가 방을 구해 독립을 했을 때에도 고모는 수시로 오셨다. 빈손으로 오지 않고 항상 뭔가를 가지고 오셨다. 주로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해서 냉장고에 넣어 주셨고, 김치는 떨어지지 않게 챙기셨다. 내가 고모집으로 뭔가를 가지러 가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서울에 살 때는 고모가 엄마 이상으로 나를 챙겼다. 고모는 혼자 사는 조카가 걱정되어 자신의 눈으로 확인을 해야 했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서울이 낯설지도 않았고, 혼자 사는 삶이 힘들지 않았다. 


 고모는 동네 반장이었다. 반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각종 고지서를 돌리고, 반상회를 주최하고 자잘한 민원을 해결해야 했다. 많은 일이 생겨도 고모는 아무렇지 않게 척척 해내셨다. 보통 반장은 몇 년에 한 번씩 바뀌는데 개봉3동 반장이었던 고모는 거의 장기집권이었다. 그럼에도 불만을 제기하거나 바꾸자는 말이 없었다. 고모는 반장으로 군림하기보다 동네의 잡다한 일을 해결하는 해결사였다. 누구 집에 잔치가 있으면 가서 일해주고, 누구 집에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 주었다. 


 고모에게 받은 많은 사랑을 조금이라도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지금은 없다. 몇 년 전에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아프거나 병원에 계시지 않았기에 고모의 죽음은 모두에게 놀라움이자 충격이었다. 고모는 길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추운 날씨임에도 밖에서 뭔가를 하시다가…….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고모가 조금만 덜 부지런했으면, 고모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돌보고 챙겼더라면 지금 우리 곁에 있을 텐데…. 고모에게 용돈을 드리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면서 생색을 낼 수 있을 텐데. 

 고맙고 그리운 나의 하나뿐인 고모. 장지가 가까운 곳에 있어서 가끔 인사드리러 간다. 내가 받은 사랑을 조카들에게 나누어 줘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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