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리리....
"여보세요, 여기 대치동 ㅇㅇ학원입니다. ㅇㅇㅇ 선생님이시죠?"
지난주 채용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려놓았더니, 어느 학원에서 면접 제의가 왔다.
"네, 그럼 X일날 뵙겠습니다"
하필 면접이 있던 그 날은 유독 추웠다. 학원이 지하철 역에서 가깝지는 않으나, 버스 타기에는 애매한 거리라, 오랜만에 대치동 구경 좀 할 겸, 역에서 내려 걸어가기로 했다. 핫팩을 2개나 사서 바지 주머니에 넣어갔는데도, 몸서리치도록 추웠고, 바닥은 꽝꽝 얼어붙은 빙판이 되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뒤뚱대며 걸어갔다. 나는 마치 거북이처럼, 패딩이라는 등껍질 속에 손과 목을 집어넣은 채 걸어갔다. 길을 찾기 위해, 핸드폰으로 맵을 켜놓고 걸어가는데, 잠깐 폰을 보는 순간에도 너무나 손이 시려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오랜 칼바람과의 사투 끝에, 마침내 학원 근처에 도착하였다. 주위를 둘러, 간판을 찾아보니, 간판은 이미 불이 꺼져 있었다. 의아스러운 마음 반, 두근거리는 마음 반으로 일단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다행히 학원 내부는 불이 켜져 있어, 문을 조심스레 밀어보니, 열려있었다.
"저기요~?"
...
아무도 없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면접 보기로 한 ㅇㅇㅇ입니다."
전화를 걸었더니, 근처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금방 온다고 했다. 몇 분을 멍하니 복도의 창문을 응시하며 기다렸다. 잠시 후, 원장이 도착했다. 60은 족히 되어 보이는 분이셨다.
학원 내부는 뭔가 이상할 정도로 허전했고, 생기가 없어 보였다. 원장실은 잡다한 문제집들과 시험지들로 섞여서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원장실에 들어가 나는 의자에 앉았고, 원장은 정신없이 뭔가를 뒤적거렸다.
보통 면접이라 하면, 구직자가 면접을 당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도 학원을 체크한다. 심지어 체크리스트를 작성하여, 담당자에게 전달하면, 간혹 '제가 면접을 보는 것 같네요 ㅎㅎ'라며 우스갯소리도 할 정도였다. 그중, 최우선적으로, 청결도나 깔끔한 정도를 보는데, 이는 운영자의 정신상태 혹은 에너지가 반영된다는 일종의 나만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새로 개업한 식당이나 매장을 가면, 그곳에서 느낄 수 있는 모종의 생기가 있다면, 죽어가거나 폐업을 앞둔 곳에는 사장의 낯빛이 어둡거나, 친절하지 않다거나, 혹은 무표정의 종업원이 로봇 같은 서빙을 하는 등의 알 수 없는 어둠의 기운이 있다. 이런 면에서, 이 곳도, 뭔가 형용할 수는 없지만, 죽어가는 기운이 느껴졌다.
"ㅇㅇㅇ 선생님이라고 하셨죠? 으음... 이력서가 어디 갔더라?"
면접을 본다는 분이, 내 이력서 한 장조차 뽑아 놓지 않은 채, 채용사이트에 나를 검색하여 찾고 있는 것도 한몫했다.
"아, 이게 왜 이렇게 안 나오지? 혹시 이것 좀 검색할 수 있어요?"
PC 사용이 서투른 듯, 나에게 내 이력서를 검색하여 찾아달라고 했다. 그동안 여러 면접을 통해 다양한 원장들을 만나 봤지만, 이런 황당한 면접은 처음이었다. 뭔가 나를 원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추운 날씨를 뚫고 힘들게 찾아온 면접자에 최소한의 성의조차 보이지 않았다. 여차 저차 하여, 내 이력서를 출력하였고, 그제야 살펴보며, 내가 활동했던 지역에만 유독 관심을 보였다.
"ㅇㅇ 지역이 사실 여기보다 더 잘살아. 여긴 어중이떠중이 다 돌아다니고, 99%가 전세거든. 그런데 ㅇㅇ지역은 99%가 토박이잖아."
면접을 보는 데, 왜 내가 근무한 지역 얘기만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어서, 묻지도 않은, 본인이 학원가에서 보낸 유구한 역사를 읊어대기 시작했다. 유명한 ㅇㅇ학원의 설립자가 본인이었다는 둥, ㅇㅇ기업의 딸내미와 유명인의 자제분들을 족집게 과외를 한 당사자였다는 둥, 화려한 대하 역사소설이 내 눈 앞에 펼쳐졌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화려할수록, 나는 감동을 받기보다는, 속으로 이런 생각이 가득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 모양...?'
차마 입으로는 내뱉을 수 없었지만, 무너져 가는 학원의 초라한 원장실에서, 그런 이야기를 할수록, 말하는 사람은 더 초라해진다는 것을 본인은 모르는 듯했다. 2시간이 지났을 까, 한참 신나게 떠들어대던 그분은, 갑자기 뭔가 선심을 쓴다는 식으로,
"기왕 이렇게 찾아왔으니, 내가 정말 중요한 노하우 하나 알려줄게. 혹시 커피 마시나?"
커피를 묻는다는 것은 이야기가 길어진다는 일종의 예고였다. 원장은 잠시 자리를 비우더니 커피를 들고 왔는데, 어이없게도 본인 앞에는 커다란 머그잔을, 내 앞에는 소주잔 사이즈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혹시, 에스프레소인가?' 하는 마음에 호호 불며, 한잔을 들이켰더니, 웬걸. 믹스커피였다. 이 정도 상황이 되자, 이 사람의 정신상태가 의심스러웠다. 노하우라고 얘기하는 소리들도 죄다 헛소리 같았다.
결국, 원장의 일방적인 3시간 토크쇼의 대장정을 마치며, 이런 얘기를 했다.
"ㅇㅇㅇ선생, 하아... 미적분 경험이 좀 부족해서 아쉽네. "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력서에 이미 기재되어 있었기에, 애초에 면접을 보려고 부를 때에는 그 점을 이미 감안했어야 했다. 원장과 대화한 지 30분이 지났을 때에는, 이미 이 곳과의 인연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있었던 건, 학원가의 실패한 한 노장의 이야기는 그게 사실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항상 흥미로웠다. 또한, (비록 무너져가지만) 대치동에서 원장 자리하려면 막말로 '이 정도 이빨은 까야하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루하지 않게 얘기한 것도 한 몫했다.
강사 카페에서 가끔 무료한 원장들이 면접을 핑계로 사람을 불러놓고는 노가리만 까다 돌려보내는 황당한 경험담들이 나돌았는데, 그 일을 내가 경험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게 카페에서만 들리던 그런 면접이었나?' 좀 황당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원장이 처량하고 애잔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부하직원도 없는 1인 학원 원장은 오죽 외로웠으면 이랬을까 싶었다.
다음날.
그 원장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띠리리리....
"여보세요? ㅇㅇㅇ선생님이시죠? 어제 얘기했던 대치동 ㅇㅇ학원 원장입니다."
"네~."
어제 혼자 머그잔에 먹은 커피가 미안했었나? 3시간 동안 붙잡아놓고 얘기했던 것이 미안했나? 아니면, 나를 다시 뽑기로 한 건가? 그 찰나의 순간에도 갖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ㅇㅇㅇ선생, 다름이 아니라 거기 근무하는 지역에 아는 강사들 없어요? 내가 보니까 지금 여기를 하루빨리 접고, 그쪽 지역에 학원을 차릴까 하는데, ㅇㅇㅇ선생이 그쪽 지역 아는 오래된 강사를 소개해줄 수 있나 해서 그래."
이게 무슨 황당하고 어이없는 말이란 말인가. 채용을 불합격시킨 강사에게 전화해서 대뜸, (나를 끼고 강사를 데려오는 것도 아니고) 아는 강사를 소개만 해 달라니. 인간의 탈을 쓰고 이렇게 염치가 없을 수가 있을까. 돌이켜보니 면접 때, 이 지역의 학교나 학생들 수준, 학부모 스타일 등등을 캐물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나를 이용하여 손쉽게 적은 비용으로 시장조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애초부터 나에게 접근한(면접을 제의한) 의도와 지금껏 그의 사소한 이기적 행동들의 조각들이 하나씩 맞춰졌다.
생각해보자. 과거가 화려했던 노장이라면, 인맥만 해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런 주변 인맥으로 팀을 꾸려서 개업을 하는 것이 보통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강사 한 명 못 구해서, 일면식도 없던 면접자에게 전화해 강사를 구해달라니. 얼마나 이기적으로 살아왔길래, 그 지경이 되었을까. 끝까지 이기적인 행태와 염치도, 눈치도, 수치도 없는 그 원장을 보면서, 왜 학원이 망가지고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이 만들어간 업보에 고통당하는 쓸쓸한 중년을 보며,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하는 경각심이 들었다.
그날은 데스크 직원들에게 스타벅스 아메리카노를 돌렸다. 소주잔이 아닌.. 벤티(venti)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