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어느 지역, 1000명이 넘는 나름 중대형 학원에 지원하였고, 팀장과 면접 끝에 같이 일해보기로 결정이 났다. 사실 교무실에 수십 명의 선생님들이 앉아서 같이 일할 정도로 큰 학원은 처음이라,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출근을 하였다. 나는 고등부에 경력직으로 들어갔는데, 업무 방식이 다소 독특해서, 담임과 부담임이 한 반을 같이 맡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당연히 나는 부담임이었고, 담임을 맡은 사람은 중등부 팀장이었다. (이하 K라고 칭한다) 육중한 몸을 힘겹게 이끌고 다녀서 그런지 몰라도(여자가 나보다 덩치가 더 컸다), 매번 한숨을 푹푹 쉬며, 미간을 찡그리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업무가 과도하거나 개인적으로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인가 보다 정도로 생각했지만, 그래도 적어도 상식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인사한 순간 이후를 제외하고는 매번 나에게 업무적인 대화를 시작할 때, 표정을 찡그리며 상당히 짜증 난다는 식의 얼굴을 하고는 말을 걸었고, 내가 대답을 하면, K는 한숨을 푹푹 쉬며 말을 했는데, 그때마다 '나한테 무슨 불만이 있나?' 생각이 들기도 하고, 기분이 상당히 불쾌하고 무례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상대를 앞에 두고, (그것도 거의 초면에) 한숨을 푹푹 쉬며 말한다는 자체가 과연 상식이 있는 사람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예를 들어, 내가 "K 팀장님~ " 하면, K는 상당히 짜증 섞인 목소리와 불독의 주름처럼 온갖 일그러진 표정으로 "네에?!!" 하며 대답을 하니, 일단 K와는 대화 자체를 하기가 싫었다.
어느 날, 업무상 무언가 착오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도 여전히 한숨을 쉬며 뭐라 하길래, 하도 열받아서 총괄 팀장님께 찾아가 말씀을 드렸다. [들어온 지 1주일도 안된 사람에게 업무상 사소한 실수에 대해 과도하게 표현을(지랄을) 한 점, 평소 차갑고 사나운 말투와 한숨을 쉬고 항상 찡그리는 표정과 태도가 불쾌하다는 점 등등]을 조목조목 전달했더니, 팀장님은 그런 컴플레인을 자주 들어 놀랍지도 않다는 표정을 하고 계셨다. K는 업무는 잘하는데, 이전에도 적지 않은 동료 강사들과 그런 부분에 대해 트러블이 있었고, 그런 점들이 본인을 깎아먹고 있다는 점까지 말하며, 나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하였다. 정작 K의 태도가 바뀐 건 아니었지만, 팀장님이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위로가 되었고, '걔는 원래 또라이구나'라고 치부했다.
그날 이후에도 K가 더 또라이라 느꼈던 점은 선생님들이 출근하여 교무실에 들어올 때마다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하면, 교무실에 계신 모든 샘들이 "안녕하세요"라고 맞받아주는 게 상식인데, 이 K만은 인사를 하지도 받지도 않았다. 그런 부분을 목격한 이후로, 나도 이제는 K를 대놓고 적으로 규정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교무실에 다른 분들에게만 인사를 하고, K는 투명인간 취급하듯이 행동한 것이다.
이 바닥에 있다 보면, 복도를 지나가는 찰나의 시간에 본 수업 장면과 수업 후 남긴 판서만 봐도, 강사의 내공을 느낄 수가 있는데, 지나가며 본 K의 강의나 판서는 별로 위협적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허접했다. 다만, 그 자리를 오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학생들에게 관심을 더 주는 스타일로 밀어붙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사회성이 떨어지고, 허접한 강의로 어떻게 오랫동안 학원에서 버틸 수 있었는지가 의아스러웠다.
여하튼, 그래서 나는 그저 수업준비를 열심히 하여 강의로 학생들에게 인정받아, 나만의 영역을 확고히하고 싶었다. (사실 팀장도 나를 뽑을 때, 수업 잘 치는 고등부 강사가 필요하다고 했었다) 그러다 보면 K 또한 나에게 함부로 할 수 없겠다는 계산을 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쉽지 않았다.
이는 대형 학원의 특성과도 맞물려 있는데, 대형일수록 강사에게 자율성을 주고, 강사의 개성을 살리기보다는 학원만의 시스템과 커리큘럼이 확고하게 정해져있어, 이런 커리큘럼을 무난하게 진행시키는 부속품 같은 강사진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풍토를 모른 채, 나는 수업 때마다 나의 개성을 발휘하는 강의를 진행했다. 예를 들면, 교재를 내 흐름에 맞게 재구성하여 프린트로 매시간 나눠주는 식이었다. 학원교재 문제 일부를 나만의 흐름에 맞게 프린트에 재구성했을 뿐인데, 이를 '학원교재를 안 나가고 자기만의 수업을 한다'라는 이야기로 윗선에 흘러갔다. 또한, K와의 전면전을 선포한 상황에, 같은 반에 담임(K)과 부담임(나)이 같이 수업에 들어가니, K는 학생들로부터 내 수업에 대해 물었을 것이고, 사소한 일도 부풀리며 윗선에 보고했을 것이 자명했다.
사실 돌이켜보니, 이 전쟁은 패배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보통 학원가는 강사 이동이 매우 잦다. 그러기에 원장 입장에서 충신(忠臣)을 찾기 어렵다. 보통 2년 이상 근무하면 대단한 것이다. 4년 차 정도 되면 작은 학원의 경우 중등부/고등부 원장이 될 수도 있는 수준이다. 그런 상황에서 K는 그 대형 학원에 7~8년을 버티고, 중등부 팀장 자리까지 꿰고 앉았으니, 원장과 K의 관계가 [들어온 지 한 달도 안 된] 나보다는 더 돈독할 것이 명백했다. 내 의견보다, 팩트보다, 확인되지 않은 K의 편향된 의견이 더 받아들여졌을 것이 뻔했다.
어느 토요일, 8시간 내리 풀 수업을 마치고 지쳐 교무실에서 자리를 정리하던 때에, 데스크에서 원장님이 보잔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이후는 예상하듯 뻔한 이야기였다. 결국 한 달 만에 나는 쓰라린 패배를 선언하였다.
돌이켜보면, 강의 하나만 잘해서 성공할 수 없음을 처절하게 깨달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주변 사람들과의 원만한 관계 유지도 나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바보같이 내가 이걸 몰랐을까? 물론 아니다. 다만, 강사의 개인기에 역점을 둔 생활을 해왔을 뿐이었다. 이전 학원은 강사의 자율성을 주고, 결과에 책임지는 학원이었다. 강사 역량이 매우 중요한 상황이었고, 협업보다는 개인 능력을 강조하는 회사였다. 자유를 주되, 결과에는 냉정하게 책임지는 구조였기에, 주변 사람들과의 정치관계에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내 옆에 있던 강사분은 학원 안에서 귀 막고 이어폰 끼며 혼자 수업 준비하고, 혼자 밥 먹고, 아무 말 없이 혼자 퇴근하였기에, 자연스럽게 '학원에서는 저렇게 지내도 되나 보다'하는 생각을 했었다. 이처럼 대인관계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덜 느꼈을 뿐이다.
그러나 큰 조직일수록, 나의 역량을 십분 발휘하기 위해선, 다른 이들의 조력이 더 크게 필요하다. 나 잘났다고 오만하게 굴며,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며, 평판관리에 신경 쓰지 않는다면, 데스크 직원들, 팀장님, 주변 강사분들 등등의 악소문이 퍼져 나에게 배정될 학생도 결국 커트되기 마련이다. 완전한 프리랜서인 대형 단과 강사가 아닌 이상, 비율제로 먹는 강사라고 하더라도, 원장 눈 밖에 나기 시작하면, 신규 학생을 유치한다 하더라도, 다른 반으로 배정되는 것이 부지기수이다. (실제로 이를 악용하는 원장도 있다) 이처럼 내 강의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나를 무대에 올리는 건 내가 아닌 학원이기 때문에, 항상 어디서든지, 겸손하며 주변 사람들을 돌보며, 지금 잠깐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감수하며 지내야 할 것이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