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서늘해지고, 가을의 공기가 다가왔다. 아무도 없는 교무실에 앉아서 창밖의 가을 하늘을 바라보니, 문득 지난날 내가 강사를 시작하게 된 그날들이 떠오른다.
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아르바이트 개념으로 단순히 시작했던 첫 과외를 시작으로 교육업(?) 과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그러다 제대를 한 뒤, 처음으로 구인광고를 통해 나름의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대치동 강사님의 보조강사 알바를 했다. 강사님 말로는 알바사이트에 공고가 올라온 뒤, 메일이 대략 100여 통이 왔는데, 쟁쟁한 스펙의 소유자들을 뒤로하고, P고를 나온 내가 갑자기 눈에 띄었다고 한다. 강사님의 조카가 P고를 나와서 뭔가 친밀한 느낌이 들었다고 하는데, 인연이 되려면, 어떻게든 인연이 만들어지는가 싶다.
여하튼, 나는 강사님의 수업 전에 학생들의 과제를 체크하고, 질문을 받아주며, 프린트물 작업을 하는 일을 하였다. 강사님이 수업을 하는 동안은 유일한 휴식시간이었는데, 학원에 있던 다른 아르바이트생과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가끔은 무료한 나머지 빈 강의실에 들어가 분필을 잡고 강의하는 흉내를 내기도 했다.
그 당시 대치동 학원 중에서도 잘나가는 학원이라 그런지, 분필도 프랑스제라고 했던가... 엄청 비싼 분필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여하튼, 그 분필을 잡고 칠판에 판서를 하기 시작하자마자 속으로 탄성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이 맛에 강의하는구나.....'
소리는 사각사각 나지만, 거친 소리와는 반대로 분필이 칠판에 닿는 촉감은 마치 바나나킥이 사르르 녹아서 미끄러지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사실 강사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말하는 것보다, 그림을 그리거나 분필로 쓰는 것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내가 어느 정도로 판서를 좋아하냐면, 화이트보드 수업은 절대 못한다. 아니 안 한다. 면접 제의가 와도, 우선적으로 물어보는 것이 칠판이었고, 화이트보드라면 무조건 거절했을 정도다. 만약 판서 없이 강의하라고 하면, 나는 강사가 안 되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여하튼, 이건 나만의 똥고집이라 치자. (다 각자만의 철학이 있으니깐)
그렇게 강렬했던 첫 판서의 느낌을 소중히 간직한 채, 나는 정확히 2달 뒤 그 알바를 그만두고 직접 강의를 하기로 결정한다. 사실 강사님이 조만간 은퇴할 때면, 자신의 자료도 다 주고, 이래저래 많은 노하우도 전수해 준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루라도 빨리 내가 직접 강의를 하고 싶었다. 나는 아무래도 남의 밑에서 일하기보다는 힘들어도 내가 맨땅에 헤딩하며 굴러야 하는 성격인가 보다.
한편, 학원가에 몸을 담근 이유 중 경제적인 부분을 빠뜨릴 수 없는데, 2000년도 중반 당시, 인터넷 강의가 붐을 일으켰고, 수많은 유명 강사분들의 '둠강(당시 많이 떠돌아다니던 유명 강사들의 강의 파일)'을 들으면서, (솔직히 고백합니다) 정말 어리석고도 순진한 생각을 하게 됐다.
'한 명당 10만 원씩 200명 앉혀놓고 수업하고, 분필 던지면서 교실 밖으로 나가면, 월 2천. 개꿀이네....'
강의는 강사의 수많은 업무 중 하나일 뿐인데.... 나는 당시 화면 속의 강사의 모습만 보고, 강의만 하고 나가면, 모든 게 끝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었다. 학원에 들어와 보니, 웬걸.... 수많은 상담업무, 관리 문자, 교재 편집, 게다가 기하급수적인 보충수업들, 직전 보충수업(시험 전날 따로 불러내어 하는 보충수업)까지.......... 단지 주 3회 3~4시간 수업으로 월 2천을 가져가는 꿀 직업으로만 알고 있었던 내가 참으로 순진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학점은 국가대표 방어율 수준이요. 취업은 bye bye. 결국 내 인생의 행보는 학원계로 수렴하기 시작하는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흘러들어온 이 바닥이지만, 예술가를 제외하곤, 강사만큼 창의력을 필요로 하는 직업이 또 있을까 싶다. 언젠가는 대형 강의실에서 수백 명을 앉혀놓고, 수업 끝나면 등 뒤로 분필 던지며 교실을 나가는.... 그리고, (정말 내가 꿈꾸던...) 보충 따위 안 하는 대형 강사가 되길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