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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아 Mar 19. 2020

운수 좋은 날

드디어 영국을 떠났다.


어제 남은 자잘한 짐까지 모두 처리한지라, 마지막 밤은 이불도 없이 패딩을 덮고 잤다.

침대를 두고 가서 그나마 다행이지, 몇 푼 벌겠다고 침대까지 팔아버렸으면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에서 잘뻔했다.


새벽 댓바람부터 일어나 택시 타고 공항으로 가니, 평소보다 서너 배는 적은 인파가 지금의 사태를 여실히 보여준다.

두 주 전까지만 해도 바글대는 런던 지하철에서조차 마스크 쓴 사람을 볼 수 없었는데, 오늘 아침 맨체스터 공항에선 마스크 쓴 사람을 절반 가량이나 볼 수 있었다.

대부분 본가로 가서 가족과 함께 한동안 집콕하려는지 커다란 캐리어를 두 개씩 끌고 나온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다들 나처럼 영국을 떠나 국제이사를 하는 사람들인 건 아닐 테고.


엄청나게 많은 비행기가 취소되었는데, 내가 타는 핀란드행 비행기는 제시간 운행이다. 며칠간 핀란드에 머물다 일본으로 갈 예정인데, 그 며칠 동안 더 난리가 나서 헬싱키 발 일본행 비행기가 취소될 가능성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일단 영국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에 만사 오케이. 3년 반 살이 후 영국에 제대로 질려버렸나 보다.


헬싱키행 비행기는 거의 만석이었는데, 산타 마을이 있는 저 북쪽으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는 텅텅 빈 채 운항되었다. 3자리 한열당 평균 한 사람도 되지 않을 정도. 덕분에 항공기 내에서도 ‘사회적 거리두기’가 제대로 시행되었다.


오늘 아침 일어난 지 10시간 만에 핀란드 로바니에미에 있는 에어비앤비에 도착. 바로 씻고 쉬고 싶었으나, 오늘 밤 오로라를 볼 가능성이 높다 하여 이틀 후에 참가하기로 했던 오로라 체험을 오늘로 당겨서 했다.

밤 9시, 체험 팀과 함께 삼십여분을 달려 칠흑같이 어두운 어느 호숫가에 도착했다. 저 멀리 하늘에 녹색 섬광이 천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로라도 오로라지만, 이렇게 많은 별은 또 처음 본다. 별이 쏟아진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다. 내가 유일하게 아는 별자리인 북두칠성도 찾았다.



체험 가이드가 오로라를 배경으로 한 사람씩 사진을 찍어줬다. 오로라 빛을 최대한 많이 잡느라 셔터스피드가 10초. 발이 얼어가도 10초 동안 꼼짝 않고 사진을 찍었다. 그것도 몇 컷씩.

촬영 후에는 모닥불에 모여 앉아 따뜻한 블랙커런트 차로 몸을 녹인 후, 잘 구워진 소시지를 먹고, 모닥불에 머쉬멜로우를 구워 달달하게 마무리.



지난 수개월간 몸 배배 꼬며 오매불망 기다려 온 오늘.

코로나 여파에도 문제없이 계획했던 대로 영국을 떠나고, 보기 힘들다는 오로라까지 본 날이다.


기념일로 지정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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