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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ya Jul 31. 2017

메뚜기 한 병과 밥 한 그릇

 뽀얀 김을 주걱으로 휘저으며 엄마는 밥을 푸고 계셨다. 

제일 먼저 아버지 밥을 놋그릇에 담아 뚜껑을 덮고 집에 없는 큰 아들 밥도 똑같이 담아 부뚜막에 올려놓았다. 그리곤 문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누가 찌그러진 양은 냄비를 쑥 내밀었다. 아무 말 없이 냄비를 건네받은 엄마는 솥 안의 모든 밥을 주걱으로 휘저어 양은 냄비에 반쯤 담았다. 그 위에 김치와 몇 가지 반찬을 얹어 건네주었다. 밥 냄새에 이끌려 어느새 부엌 문안으로 얼굴을 내민 때 국물 짤짤 한 열 살쯤의 남자아이가 어색한 표정으로 건네받았다.


  우리가 이 동네로 이사 온 이후 한 달 정도 지나서 시작된 일이니 벌써 서너 달은 되었을 것이다. 그 당시엔 누구나 먹거리가 넉넉지 못해 고생할 때라 아침마다 구걸하러 오는 거지 아이에게 흔쾌히 아침밥을 챙겨주는 사람들은 드물어서 군말 없이 밥을 건네는 사람에게 발길이 가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었다. 언제나 엄마와 나의 아침은 누룽지 끓인 것이었지만 전 날 퍼 놓은 오빠 밥에서 크게 한 숟가락을 떠서 내 그릇에 담아주는 쌀이 많은 밥에 동생들의 눈길엔 부러움이 가득했다.


  영식이가 거지 아버지를 따라 이 마을에 정착한 지는 오래된 것 같았다. 언덕배기 상여 집에서 살고 있으며 딱 밥때가 될 때만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디서 술이 생기는지 그 애 아버지는 언제나 취해 있었다. 동네 술도가에서 술지게미를 갖다 먹어서인지 아니면 진짜 술을 마시는 건지.

  그즈음 우리 동네 교회에 새로 온 목사님은 교세를 넓히기 위해 새로운 일들을 시도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아침저녁으로 치는 교회 종이 몇 번 울리는지를 맞추면 공책과 연필을 주고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고 열 번을 오면 크레파스와 스케치북도 주었다. 그리고 메뚜기를 한 병씩 잡아오면 5원씩 준다고도 했다. 논에 가면 지천으로 보이는 메뚜기를 잡는 일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라 우린 학교가 파하자마자 들판으로 달려갔다. 목사님의 공책에 매일매일 불어나는 그 돈이 우리에겐 크나큰 희망이었다. 시골에선 돈 구경하기가 가뭄에 콩난 것 같았으니 말이다.


  어느 일요일 교회에 갔을 때 영식이는 아버지와 함께 앞자리에 앉아있었다. 목사님은 목소리를 높여 불쌍한 우리의 가난한 이웃이 오늘 아버지의 품 안에 왔으니 어린양을 돌보아 주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뜻이 이곳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기도를 했다. 주일마다 영식이는 앞자리에 앉아서 목사님이 사다준 까만 중학생 교복을 뽐내고 있었다. 밥을 얻으러 오는 발길도 뚝 끊어지고 영식이는 교회에서 살게 되었다고 했다. 엄마는 나그네 장맛 떨어지자 주인 보리양식 떨어진다며 시원해하면서도 아침마다 대문 밖을 나가보라고 하셨다.

  그 해 겨울, 상여 집에서 영식이 아버지 시체가 발견되었다. 하지 말라는 게 많아서 교회에서 살 수 없다고 나와 버린 그는 끝내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어른들은 아들이 비러 온 밥도 못 먹고 온기도 나눌 수 없어 갔다고들 했다. 굶어 죽었는지 얼어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마을 사람들이 가마니에 둘둘 말아 리어카에 싣고 가는 것을 영식이도 보고 있었지만 그 아이 얼굴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이제 때릴 사람도 없기에 그랬을지도 몰랐다. 


  메뚜기 잡은 돈을 공책에 적지만 말고 돈으로 달라는 큰아이들의 요청에 차곡차곡 모아서 중학교 갈 때 목돈으로 찾아가라고 하던 그 목사님은 어느 날  밤사이에 도망을 가 버렸다. 손이 야물지 못해 메뚜기가 너희들을 잡겠다고 놀림을 받았지만 동생과 내가 모은 돈도 50원이나 되었다. 그 돈으로 6학년이 되면 경주로 가는 수학여행을 꼭 갈 것이라고 꿈도 많이 꾸었었는데,

  어수선한 교회에서 영식이를 돌봐줄 사람은 없어서 그 아인 다시 우리 집에 나타났다. 까만 교복이 흙과 지푸라기로 색을 잃어 갔다. 그 후 주님의 어린양은 목사님과 더불어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갔다.


 어른이 되어서 그때 그 아이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내가 물었을 때 엄마도 말끝을 흐렸다. 옆 동네서 본 사람이 있었다고 하더라고. 내 것 내놓기가 아까워 조막손인 나도 언젠 가는 언젠가는 하며 벼르기만 하는데 감히 누굴 욕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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