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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ya Jun 27. 2017

참외를 고르면서

  새로 생긴 과일가게에 노랗고 빨간 과일들이 즐비하다. 입주 아파트라 상가 형성이 덜 되다 보니 일찍 문을 연 이 가게로 사람들이 몰리게 되었다. 게다가 매일 바뀌는 미끼 상품에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는 참새처럼 아줌마의 습성이 나로 하여금 매일 이 곳을 서성이게 한다.


오늘의 대박 상품은 참외라고 외쳐대는 푸릇푸릇 생기 넘치는 점원의 외침처럼 정말로 샛노랗고 탐스런 참외가 진열대에 수북이 쌓여있다. 바구니를 든 아주머니들의 틈을 비집고 나도 매 눈이 되어 합류했다.

  참외. 30여 년 전의 그 일이 떠올라 설핏 미소를 날린다.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나 그다음 해였을 것이다. 고시 공부를 하고 있던 오빠의 친구가 내게 마음이 있었나 보다. 그다지 영민하지 못했던 나는 하늘 같은 오빠의 친구는 역시 하늘로 보여 그 사람이 나를 보기 위해 그렇게 자주 찾아온다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그 시절엔 큰 절을 중심으로 주변에 고시생들을 대상으로 한 하숙집들이 운집하게 되고 그곳이 소위 고시촌이 되었다. 그 고시촌에 기거하던 그는 주중에 한 번 꼴로 우리 집을 찾아왔고 올 때는 언제나 백화점에서 파는 과일 바구니를 들고 왔었다. 

시장에서 파는 과일조차 양껏 먹기가 힘든 시절에 백화점에서 파는 그 탐스런 과일들은 우리를 주눅 들게 했었던 것 같다. 


  한 번은, 박스를 열자 참외처럼 생겼는데 훨씬 크고 샛노란 과일이 있었다. 손님은 방에 홀로 남겨둔 채 우리 딸들 셋과 엄마는 부엌 바닥에 앉아 이것이 과연 무엇일까 탐색을 하고 있었다. 

  박스에 붙은 상표엔 분명 melon이라 쓰여 있는데 멜론이라면 그물망 같은 껍질을 가진 머스크 멜론만을 알던 때라 왜 멜론이 참외처럼 생겼는지 궁금했었다. 물론 참외를 영어로 melon이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상품명에 참외라 쓰여 있지 않고 melon이라 쓰여 있다는 건 참외가 아닐 거란 확신마저 들게 했다. 매번 백화점에서 이색적인 과일만을 사 오던 그 오빠 친구에 대한 인식이 평범한 참외를 사 올 리가 없다는 믿음으로 발전하여 사전을 갖다 놓고 참외가 아닌 다른 뜻이 또 있지는 않나 찾아보게 했다.


  오래전 일이라 그 맛이 어떠했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고, 부엌 바닥에 쪼그려 앉아 서로 킬킬 거리던 모습만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그저 참외였던 것 같다. 백화점용이기에 우리가 흔히 접하던 것과는 달리 크고 이뻤으리라. 양구 멜론이라는 황금 멜론이 참외 모양과 비슷하긴 하지만, 참외인 진짜 melon 보다는 좀 더 동그란 감이 든다.

이렇게 이른 철에 미끼 상품으로도 팔 수 있는 귀한 참외를 고르면서 옛 생각에 빠져있다. 

  그땐 삶이 무에 그리 심각하고 무거웠는지 밤 낮 삶에 대해 고민하느라 그 오빠 친구의 청춘 이야기는 한낮 부질없어만 보였었다. 결국 나는 산사에서 속세와의 인연을 끊을 각오를 했다. 사람의 감정은 참으로 재미있는 것이 그 기로의 순간, 시답잖게 여기던 남녀의 사랑이 그렇게 절실하게 나에게 다가옴을 느꼈다. ‘어떤 멋진 남자의 헌신적인 사랑에 푹 빠져 보리라, 가슴 찌릿한 사랑을 하지 않고서 부처님의 제자가 된들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라는 말도 안 되는 욕망이 나를 휘감았었다.


  나에게 세속적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그는 지금 세속의 영락에 나를 남겨두고 성직자로서 훌륭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삶이란 얼마나 아이러니하고 재미있는지... 

  실하지만 귀하지 않은 참외 같은 현실의 삶이 고단해서인지, 어릴 때의 그 달콤하고 화려한 melon 참외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 과하다 싶은 양을 샀다. 아직 철이 아닌데도 맛이 들었다고 연방 말하면서 식구들에게 권해본다. 사실 나는 참외의 차가운 성질 때문인지 배탈이 나서 얼마 먹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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