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빛나는>을 보고
한 때 내 심장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버려야 했던 적이 있다. 심장을 버리는 일은 말처럼 가볍지가 않아서 나는 한참 동안 깜깜한 어둠 속을 헤맸었다. 그 어둠이 너무 무섭고, 처음이라 나는 앞으로 한 걸음도 나갈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그 어둠을 오롯이 나 홀로 버텨야 했던 것이 두려웠던 것 같다.
처음에는 내 심장의 무게를 다른 사람도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내 상실이 이렇게 아프다고, 내 아픔을 어서 이해해 달라고 외쳤었다. 하지만 내 심장이 그의 가벼운 농담의 소재가 되었을 때, 그 무게는 오로지 나만의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결국 내 상실은 나만이 이해할 수 있다. 타인이 이해할 수 있다는 건,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그의 생각이다.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영화 <빛나는>은 유명한 사진작가인 나카모리(나가세 마사도시)가 시력을 잃으면서 앞을 볼 수 없는 이들을 위해 영화 음성 해설을 만드는 모임에 참여한다. 그곳에서 해설을 쓰는 작가 미사코를 만나고 서로의 견해 차이로 티격태격하던 그들이 서로를 이해해가며 아름다운 마무리를 만들어내는 이야기이다.
미사코는 배리어 프리 barrier-free 영화(장애인을 위해 음성으로 화면을, 자막으로 소리를 전달하는 영화)에 대한 자신의 이해, 시각 장애인들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매 순간 고민한다. 그녀는 처음에 영화가 희망을 담고 있다고 이해했고, 그걸 표현하는 것이 해설을 듣는 이들에게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노감독은 “ 나 정도의 나이가 되면, 삶과 죽음이 불분명해진다..”며 자리를 떠났고, 나카모리는 그녀의 해설이 방해가 된다고 쏘아붙였다. 미사코는 상실과, 현실을 모두 거부하는 나카모리에게 조금씩 다가간다. 그녀는 그를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다는 것은 정말, 슬프다”라고 되뇌었을 때, 나는 그 단어가 너무 작다고 생각했다. 이해하는 것은 ‘슬프다’는 작은 말로는 다 감쌀 수 없다. 미사코가 슬펐던 것은 나카모리를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그 생각이 슬펐던 것이다.
미사코의 이해와, 나카모리의 상실이 또 다른 빛으로 채워진 것은 그들이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했던 순간이 아니라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어둠을 받아들였던 순간이다. 미사코는 엄마가 상실감 속에서도 놓지 않았던 희망의 끈 속에서, 나카모리는 본인의 상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던 행동 속에서 또 다른 형태의 빛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빛은 그들이 또다시 오늘을 살아가는, 모래언덕을 한걸음 한걸음 넘어가는 희망이 되었다.
각자의 상실감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버티고 있는 무게감은 누구의 온전한 이해도 얻을 수 없다. 그저 내가 그 속에서 빛을 발견하면 되는 것이다. 그 빛은 노감독의 말처럼 완전한 행복한 결말도, 강요되는 희망도 아니라 그저 내가 내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힘이 될 뿐이다.
심장의 상실은 그냥 저절로 희망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흐름이 마음에 스며들었다. 영화는 희망을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내가 그저 버티거나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상실을 그대로 마주했을 때, 그리고 그것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였을 때 새로운 빛이 되어 스며든다는 것을 그냥 묵묵히 느끼게 했을 뿐이다.
내가 상실의 무게감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온전한 이해를 통해서가 아닌, 내가 그 무게감을 내 마음에 매단 채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걸어가는 것을 통해서이다.
나카모리가 마지막에 미사코에게, ‘본인이 그쪽으로 혼자 가겠다’고 외치는 얼굴에서, 영화 속 배리어 프리 영화의 마지막 해설이 오버랩되는 듯했다.
그것은 꽤나 빛나는, 상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