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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ya Nov 16. 2017

세련된 미국댁

사람들이 베푸는 자선이 얼마만큼이 순수할 수 있나 란 소로의 글을 읽으면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옛 기억이 떠올랐다. 

대학을 다니던 어린 시절이었다. 아침마다 버스를 타기 위해 걸어가는 곳에 조그마한 목공예 가게가 있었다. 혼수용으로 쓰는 원앙새 나막신 다반과 큰 상을 주로 만들어 판매하는 곳이었는데 아기자기한 가게도 마음에 들었을 뿐 아니라 평소 목공예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배워보고 싶었다.

  빼꼼히 문을 열고 배울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아저씨가 손짓으로 말을 못 한다고 했다. 그리고 종이에 내일이라고 쓰면서 뭔가를 전달하려고 애쓰는 모습에 아 내일 오라고요?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입모양을 보고 알아듣는 것 같았다. 


  다음날 갔더니 예쁘고 상큼한 스무 살가량의 여자 아이가 있었다. 딸이라고 소개하면서 아빠에게는 수화로 나에게는 말로 또박또박 통역을 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조각칼 쓰는 법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몇 달이 지나고 나서는 주문이 들어오는 물건들 중에 간단하고 단순한 일들은 나도 거들 수가 있었다. 물론 그 아이 진희의 감독 하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긴 했다. 

진희는 엄마 아버지 두 분 다 장애를 갖고 있었지만 자신은 정상인으로 듣고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화로 엄마 아빠의 입과 귀가 되어 줄 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주일마다 교회에서 수화로 통역하는 봉사도 하고 있었다. 진희 엄마가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난 아이가 진희였고 열다섯이나 아래인 그때의 남편과 결혼하면서 외가에서 살던 진희를 데려온 것이 몇 년 되지 않는다 하였다.


어느 일요일에 교회에 가자는 초대를 받았다. 2층 한 곳에 장애인을 위한 예배석이 따로 있는 제법 규모가 있는 교회였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그렇게 많은 장애인이 있는 줄은 몰랐었다. 목사님이 찬송가 제목을 말하자 1층과 2층 대부분에서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가 장엄하게 울려 퍼졌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는 수화로 통역해 주는 지휘자에 맞춰 몇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너무나도 열심히 수화로 노래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에 푹 젖어있는 표정이었다. 어릴 때 교회를 다녀서 알고 있는 노래였기도 했지만 솔직히 나는 내가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기쁨과 정상인으로서의 우월감을 이때만큼 느껴본 적이 없을 정도여서 목청을 다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시피 찬송가를 불렀었다. 

     

학교 시험 준비로 몇 달이 흘러 다시 찾아갔을 때 진희 엄마는 진희가 미국에 사는 교포와 결혼할 거라며 두툼한 금반지를 보여 주었다. 큰 슈퍼를 하는 집인데 엄청난 부자라 우선 약혼반지로도 이렇게 큰 금반지를 주더라며 자랑을 했다. 미국이라는 말만 들어도 부자가 된 듯한 꿈의 나라에 그것도 부자 집에 시집을 간다고 온 식구가 들떠 있었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을 넘긴, 장애인 부모를 둔 교육받지 못한 어린 아가씨를 데려가서 결혼시킨다는 건, 거의 보쌈해 가는 것이라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겠지만 딸이 최소한 배곯지 않고 의붓아버지 밑에서 눈칫밥은 먹지 않을 것이란 안도감 하나 만으로 기뻐하는 진희 엄마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진희 역시 그 사실을 모를 만큼 어리숙하지도 않았다고 본다.

     

진희가 미국으로 떠나고 나도 취직과 결혼 그리고 아이들을 키우는 바쁜 일상으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 어느 해 친정을 다니러 간 길에 옛 동네를 가보게 되었고 정말로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진희네 가게가 아직도 그곳에 자리하고 있는 걸 보았다. 아기자기한 목각 인형들과 외국산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진희 아빠는 아직도 일을 하고 있었고 예쁜 할머니가 된 진희 엄마와는 반가움에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비록 종이에 써서 전달하는 소통이었지만 서로의 표정과 몸짓으로 지나간 시간들을 메울 수 있었다. 딸이 미국에서 팔 수 있는 물건들을 보내주어서 그동안 그럭저럭 장사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정도 듣고, 아들 딸을 옆에 끼고 찍은 진희 가족의 사진도 보았다. 

    

그러고도 3년을 보내고 나서야 나는 진희를 만날 수 있었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나온 한국이라며 언니를 꼭 만나고 싶다고 전화를 해왔다. 멀리서 보아도 진희는 알아볼 수 있었다. 차림새에 벌써 미국 냄새가 난다고 할까 뭔지 모를 화려한 여배우의 모습을 하고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여전히 세련된 모습이었다.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이어졌다. 남편은 신체장애가 있는 분이었지만 다정한 사람이어서 마음고생은 하지 않고 살았다고, 딸과 아들은 둘 다 유명 대학을 나와 자기 몫을 다 하며 살고 있는 데 슈퍼만 하던 시댁이 사업을 확장하다 보니 자기가 숨 쉴 틈조차 없더라는 얘기들이었다.


 깍듯이 언니라고 부르는 진희에게 나는 언니의 자리를 지키려 애쓰면서도 나 자신의 삶을 자꾸만 살짝살짝 비교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반갑기만 했고, 또한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행복해하는 모습으로 안도되었던 마음에 자꾸만 스멀스멀 질투심이 피어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너 보다는 더 우위에 있다는 여유로움이 위협을 느끼자 모든 걸 다 줄 듯한 미소와 한량없던 마음에 균열이 생긴 것이었다. 뭔가는 내가 더 나은 구석이 있을 것이며, 그리고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 아이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급기야 화려하게 칠한 가짜 손톱으로 멋을 내긴 했지만 잔주름이 많이 진 손바닥을 보고 나서야 내 마음은 평정을 되 찾아가고 있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은 지금도 내 마음을 편하게 하지 않는다. 부끄러웠던 그 마음이 아직도 내게는 남아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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