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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책이름 Sep 24. 2020

유년의 기억을 소중히 아껴주는 일

밤에 읽는 책 │『잠옷을 입으렴』


퇴근 후, 따듯한 물에 샤워를 하고 잠옷을 꺼냅니다.

얼마 전에 새로 산 잠옷. 보슬보슬한 촉감이 좋습니다.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잠옷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몇 번을 망설이다 사서 그런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귀찮아 매번 샤워를 자기 전까지 미루던 저였는데, 잠옷을 사고 나서는 집에 돌아가 가장 먼저 샤워부터 합니다.


따듯한 물에 샤워를 하고 포근한 잠옷을 입는 일은 제게 어떤 의식처럼 여겨졌습니다. 세상의 모든 기억을 벗고 안전하고 온전한 나의 세계로 들어가는 아주 우아하고 멋진 일처럼 여겨지기도 했으니까요.


오늘 밤에 읽을 책은

이도우 작가님의 <잠옷을 입으렴>입니다.


잠옷을 입고, 꺼낸 오늘의 책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장터에서 산 흔한 잠옷일 뿐이었지만, 오로지 잠을 위한 옷이 생긴다니 기대감으로 두근거렸다.
종일 입었던 내복을 벗고 잠옷으로 갈아입는 일이 왠지 고상하고 격식을 갖춘 일과처럼 느껴졌다.

어쩐지 제 마음을 그대로 담아 놓은 구절 같기도 합니다.




<잠옷을 입으렴>은 이종사촌 자매 수안과 둘녕의 성장을 그린 소설입니다. 읽다 보면 잊고 살아온 어느 유년의 기억과 경험해보지 못한 어떤 시절에 대한 향수를 아련히 떠올리게 합니다. 이상하게 이 소설만 읽으면 마음이 잔잔해 지면서도 유난히 울렁이고, 어딘가 따꼼따꼼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슬퍼서, 아름다운데 슬퍼서, 좋은데 가슴 아파서. 중간중간 몇 번을 멈춰 심호흡을 하기도 합니다.


엄마가 아무 말 없이 집을 떠난 후

모암마을 외가에 맡겨진 열한 살 소녀 둘녕.


그곳에는 외할머니와 이모 내외, 막내이모와 막내 삼촌 그리고 동갑내기 사촌 수안이 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던 수안과 둘녕은 작은 사건을 계기로 서로에게 마음을 활짝 열게 됩니다.


쉬이 잠들지 못하는 아이 수안과

그리움을 꾹꾹 참고 살아가는 아이 둘녕.


두 아이는 그렇게 '우리'가 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깊은 버팀목이 되는 '우리'가요.






두 아이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곤 스스로에게 물어보죠.

'내게도 기억 속에 두고 온 사람이 있다면, 누구일까?' 하고요.


그러자 오래 전 기억이 떠오릅니다. 모두가 제 곁을 떠나던 시절, 제 곁을 지키던 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한 사람을 통해 불안했던 마음은 잠시나마 안정을 찾았던 시절.


자라며 우리의 마음은 견고해지면서도 균열이 생겼고, 

그런 견고와 균열이 이어지며 우리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잠옷을 입으렴>의 둘녕과 수안의 이야기를 읽으며, 오래 전 그와 저의 깊은 우정을 떠올렸습니다.

이제야 제 삶에서 그와의 기억이 얼마나 깊은 의미였는지,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 봅니다.




이도우 작가님의 문장에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마음을 울리는 힘, 울게 만드는 힘. 나와 상관없는 이들의 이야기로 기억 속 나를 더듬게 만드는 힘.


작가님은 <잠옷을 입으렴>을 향해 '내 안의 유년과 화해하는 소설'이라 이야기합니다. '화해'란 결코 혼자만의 몫이 아니라고요. 어린시절 우리는 설명하는 데 서툴렀고, 모든 관계에 서툴렀습니다. 다정히 다가가 등을 껴안으며 그동안 내 마음은 이러했답니다- 고백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을 땐, 사랑했던 이들은 이미 떠나고 없었죠.


그녀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서글프게 웃었다. 아직도 날 좋아하지 않는구나 말하는 듯했다.
그렇지 않다고 나는 속삭였다.

서로가 살갑지는 못했어도 한 번도 싫어한 적은 없었다고.
우리는 설명하는 데 서툴렀고 모든 관계에 서툴렀다.

다정히 다가가 등을 껴안으며 그동안 내 마음은 이러했답니다 고백하기엔,
저마다 진심을 전하는 법을 잘 알지 못했다.


<잠옷을 입으렴>은 읽고 나면 서글픈 마음이 듭니다. 그러면서도 한없이 마음이 따듯해집니다.

둘녕과 수안이 살았던 시절은 제가 살았던 시절도 아닌데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아마, 우리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누군가를 사랑해보았고, 누군가를 아파해보았고,

또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잠옷을 입고 침대에 앉아 좋아하는 소설을 읽습니다. 오늘 밤은 어딘가 축축합니다. 방의 천장 모서리를 살피며 저기 어딘가 축축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모서리를 살피며 모암마을의 둘녕과 수안을 떠올립니다. 포플러 신작로를 따라 집으로 오던 그들, 클로버 문고, ABE 문고.. 할머니의 부엌, 여름밤 모깃불 아래서 소곤댔던 그들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오래전 저와 그를 떠올립니다.

힘든 밤 서로의 푸념을 나눴던 통화, 공원에서 기타를 쳤던 여름..


오늘 밤은 어딘가 축축하지만, 이 마음을 슬퍼만 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따듯하고 포근한 잠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죠.


저는 이렇게 성장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내 안의 유년과 화해하는 소설'이라던 작가님의 말씀처럼,

저는 수녕과 수안을 바라보며 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수안과 내가 사는 세상은 그런대로 따뜻했습니다.

외할머니의 부엌엔 맛있는 음식이 있었고, 모두가 잠든 뒤에도 처마에 매달린 백열등은 꺼지지 않아
우리 방은 밤새 달빛보다 더 노란 빛으로 차 있었습니다. 

나는 새삼 수안과 나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들어줄 사람이 삼촌 말고도 또 있으면 좋겠습니다.










밤에 읽는 책

마음이 쓸쓸한 어느 밤,

침대에 앉아 읽기 좋은 따듯한 책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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