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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책이름 Sep 17. 2020

기억하지 못해도 우리 둘의 세계는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밤에 읽는 책 │『조용한 비』

맛에는 힘이 있다.
먹기 전까지 가슴을 채우고 있던 부정적인 감정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하루의 기분이 사르르 녹습니다.


정말 맛있는 음식은 한 입 딱 베어 물면 '아! 맛있다!' 온몸에 온기가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그런 책이 필요했습니다. 한 입 딱 베어 물면 '아! 맛있다' 하는 느낌이 들면서 기분을 사르르 녹게 만들어 줄, 마법 같은 책이요.


그래서 선택한 책 <조용한 비>입니다.



처음부터 직장이 사라져 직장을 잃은, 그래서 몸도 마음도 꽁꽁 얼어붙은 유키스케가 등장합니다. 유키스케는 오고 가면서 사 먹은 붕어빵 맛에 흠뻑 빠졌는데요, 한 입 먹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아! 맛있어요!'라는 말을 내뱉고 맙니다.


“이거, 맛있어요.” 
순간적으로 나온 말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이래서야 유아 수준이다. 두 살 배기의 어휘다.

그래도 여자는 검은자위가 큼지막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볼을 발갛게 붉히더니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조용한 비』 p. 9 


한 입 베어 물면 웃음이 터질 만큼 행복해지는 고요미의 붕어빵.

먹는 것만으로도 체온이 2도쯤 상승하는 고요미의 붕어빵. 


유키스케는 매일매일 가장 맛있는 붕어빵을 만드는 것을 삶의 보람으로 느끼고,

최선을 다해 붕어빵을 만드는 고요미에게 점점 매료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요미는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사고로 더 이상 새로운 기억을 간직하지 못하는, 내일이 되면 오늘의 일을 다 잊어버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오래된 기억은 가지고 있지만, 새롭게 쌓아가는 기억을 안고 살지 못하는 세상에 고요미는 덩그러니 놓이게 됩니다. 


그런 고요미와 다리가 불편해 평생 목발을 짚고 살아가는 유키스케지만

서로의 부족한 보듬으며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


책을 읽으며 사람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생각했습니다. 가장 먼저 기억과 추억으로 살지 않을까, 하루하루를 쌓아가는 어떤 맛으로 살지 않을까 생각했죠.


<조용한 비>는 잃어버린 소중한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를 지금 이 순간뿐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삶 속에서 부딪치는 순간순간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제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을 함께해도

기억은 유키스케 안에서만 쌓여 갑니다.


아침에 맛있게 먹은 마른반찬이나, 둘이 함께 걸어서 돌아오던 길에 떠 있던 달처럼,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공유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견딜 수 없이 슬퍼진 유키스케는 고요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유키스케는 결국 사람은 ‘매일매일 생활 속에서 하는 생각’으로 이뤄진다는 답을 결국 찾고 맙니다. 오늘을 내일로 이어가지는 못하지만 고요미는 분명히 하루하루 소중한 시간을 살아가고 있고, 유키스케 또한 고요미와 자신의 세계 속에 서로가 존재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요.


비록 내일이면 다 잊겠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해도 둘의 세계는 사라지지 않는다고요-

고요미의 어제를 기억하고, 오늘을 함께하며, 내일을 지켜주는 유키스케가 있으니까.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사랑'이란 말을 떠올렸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사랑한다는 흔한 말 하나 없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보여주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소리 없이 내리는 조용한 비처럼 고요하고 순수한 사랑 이야기에 촉촉하게 젖어드는 기분.


오늘 밤의 책은 성공입니다.

맛있는 책, 마음을 녹이는 책.


내일이면 벌써 금요일이네요. 이번 주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맛있어지는 고요미의 붕어빵처럼,
함께하는 이 순간만큼은 어떻게든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

그것이 바로 사랑일 테니까. 








밤에 읽는 책

 마음이 쓸쓸한 어느 밤,

침대에 앉아 읽기 좋은 따듯한 책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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