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 요슈타인 가아더 - 현암사
'지난 3,000년을 설명할 수 없는 이는 하루하루를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 살아가게 되리라.' -괴테-
[소피의 세계]를 펼치자마자 만나게 되는 첫 문장이에요. 솔직히 말하면, 이문장을 보고 얼굴이 달아올랐고 콧방귀를 뀌었어요. 저를 두고 하는 말 같은 것이 딱 기분 나빴 거든요. 지난 3,000년이 다 뭐예요. 지난 1년도 채 설명할 수 없는데 말이에요. 역사와 철학 그리고 성경공부를 깊이 하고, 그 세월이 내 머릿속에 쫘악 나열이 된다면. 친구와 잡담을 나누듯 그 깊은 이야기들이 술술 입에서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교과목 시험을 치르기 위한 지금까지의 주입식 공부는 소용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해 준 책이었어요. 분명 다 아는 내용인데 새삼스러운 내용이 한두 군데 여야죠. 이 책을 통해 서양철학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으니 왜 괴테의 말로 이 책을 열게 되었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어요. 저는 진짜 어두운 곳에 있었고, 있고요. 글을 읽는 동안 만이라도, 잠시나마 그 어둠을 걷어내어 보는 경험을 했어요. 그래도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채 살아가게 되겠지요. 내입으로 설명을 못할 테니까요.
저는 불가능한 그 세월에 대한 설명을, 크녹스라는 인물이 대신해 줌으로써 대리만족을 느꼈어요. 대화체가 주는 편안함이 좋았고요. 다소 억지스러운 내용전개에 가끔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그다음 나올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한 설정이라는 점이 갈수록 흥미로웠어요. 시야가 넓어지고, 다양한 철학과 세계관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 것 같아요. 띄엄띄엄 얄팍한 점선 같은 지식들이 가늘지만 길게 이어진 직선이 되었어요. 여전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어요.
제 알고리즘은 '유시민' 선생님을 자주 등장시키는데요. 이 책을 읽고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분은 참 다르긴 다르다.. 란 생각이 들었어요. 책을 읽은 것을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입으로 내뱉는 일이 얼마나 높은 지적 수준을 요하는지... 소피의 세계를 읽고 서야, 지식인이라 불리는 분들에게 존경의 마음이 들더라고요. 저는 머리도 나쁘고, 이제는 갱년기 증상으로 기억력 감퇴 증상이 있어서, 그런 일은 하늘의 별을 따는 일이 되어 버린 것 같아요.
게으름은 천재의 이상이고 나태함은 낭만주의의 첫째 덕목이었데요. 낭만주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저는 유명한 철학자로 이름을 남겼을 것만 같아요. 의식의 흐름대로 그리고, 쓰고, 읽으면서 생각하는 삶. 일상적인 일들은 잠시 접어두고, 자연을 동경하며 동화적 삶을 살아보는 것, 깊숙한 곳 어느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제 모습 같아요. 후에 낭만주의 철학의 모든 사상들은 헤겔에 의해 재해석되었는데, 헤겔의 이성적인 양념이 들어간 해석이 썩 마음에 들었어요. '우리 낭만주의자들은 다 뜻이 있어서 그러는 거야.'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말이에요. 이 책을 읽으면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읽게 되었는데요. 그 속에 나오는 인물 중 영혜나 혹은 그녀의 예술가 형부는 낭만주의에 잔뜩 빠졌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너무 그렇게 까지 해석할 것은 없지만, 느낌적 느낌이랄까요.
사실, 다윈은 과학자로 분류되어 있는 줄만 알았어요. 과학책에서 배웠던 걸로 기억이 나거든요. 다윈의 발견도 한 시대를 이끈 철학적 사상과, 발견이었다는 사실을 가만해볼 때, 다른 철학 사상에 의해 또다시 혁명적인 변화가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기대가 되네요.
'다윈은 평생의 연구생활동안 아주 사소하고 점진적인 변화라도 긴 시간에 걸쳐 계속되면 거대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절대 있지 않았어.' ( P. 588 ).
다윈의 길고 긴 위대한 발견을 이끌어 갈 수 있게 해 준 동력은 바로! 가랑비에 옷적시기! 저도 조금씩이지만 꾸준한 노력과 시간을 들여서 어떤 작은 변화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하는 대목이었어요. 다윈의 꾸준함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니까요.
낭만주의에 감동을 받고, 논리적인 자연주의를 거쳐 실존주의에 정착을 했어요. 인간의 실전적인 상황에 근거를 둔 이 사상은 20세기 실존철학이라고도 부른데요 (P. 649). 키르케고르, 헤겔,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받아 ' 역사주의' 반동의 성격을 뛴 독일의 니체, 프랑스의 장폴 샤르트르가 대표적인 실존주의자들이래요.
'우리는 자유로운 개체야. 우리의 자유는 우리가 평생 동안 무언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선고를 내렸어. 결정과 선택이 중요하지. 샤르트르는 인간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책임을 결코 피할 수 없다고 지적했어.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부인하면서,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해야만' 했다거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특정한 시민적 책임을 ' 따라야만 '했다고 변명할 수 없어. 이런 식으로 익명의 대중 속에 휩쓸려 사는 사람은 인격을 상실한 군중의 일원에 지나지 않아. 그는 스스로에게서 도피해 거짓된 삶으로 숨어버리는 거야. 그러나 인간의 자유는 무엇이든 우리 스스로 행동하는, 즉 참되고 ' 본래적인' 실존일 것을 명령하지.'
(P. 653)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라고 표현하며 인간의 실존에 대한 철학적인 물음을 제기한 샤르트르의 지적은 제게 크게 와닿았어요. 저는 책임감을 상당히 중요시하는 사람이에요. 반대로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자신을 늘 답답하기도 하지요. 그런 면을 합리화해 주는 철학자를 만나니 참 반가웠지요. 또한 내가 하는 일과 행동에 대해 나는 과연 얼마나 책임 있게 행동하려고 하는가? 나는 과연 얼마나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사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보게 해 주었어요.
소설은 소피와 크녹스 선생님 그리고 히데와 히데아빠의 관계를 둘러싼 수수께끼 같은 상황들을 풀어내며, 이야기를 만들어가요. 오랜 서양철학 이야기가 끝 나갈 때즈음 이 소설도 빅뱅을 끝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지요. 당황스러운 이야기 전개가 흥미롭기도 하고, 좀 생소하기도 했어요. 소설 속의 소설에서 튀어나온 소피와 크록스의 인물 설정이 믿기지가 않아서, 말미로 갈수록 또 반전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읽게 되더라고요. 철학 이론서인 줄 알고 읽어나갔던 책은 판타지스런 마무리를 하며, 이 책의 장르는 소설!이라는 존재감을 드러냈죠.
'너와 나도 대폭발로 존재하기 시작했어. 우주의 모든 물질은 유기적인 통일체이기 때문이야. 태초의 어느 순간에 모든 물질은 한 덩어리로 뭉쳐 있었어. 그리고 그건 질량이 엄청났지 아주 작은 크기지만 무게가 십억 톤이나 됐어. 이 최초의 물질이 엄청난 중력 때문에 폭발했고 모두 산산조각 났지. 우리가 하늘을 쳐다보는 건 우리 자신에게로 가는 길을 찾는 거란다.' p731
우리는 대폭발로 인해 존재하기 시작했고, 하늘을 쳐다보는 건 우리 자신에게로 가는 길이라며 크녹스의 입을 빌려 마무리 짓는 이 책은 , 결국 다윈의 자연주의를 지지하는 듯하지요?. '빅뱅'이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었든 되지 않았든, 저는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 사실이에요. 왜냐하면 과학은 늘 연구결과에 따라 변화하고, 우리가 무엇을 믿고 끝까지 연구하느냐에 따라 또 그 결과는 달라지니까요. 그렇다고 신의 존재를 믿느냐? 그것도 아니고요. 그럼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 우린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사실, 늘 여기서 저의 대답은 끝이 나요. 과학도 신도 부정한다면 답은 무엇인가.... 저는 그 질문은 개인에게 맡겨진 거라고 생각해요. 믿고 싶은 것을 믿고, 지금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게 답이 아닐까요? 그것이 신이든, 자신이든, 자연이든, 과학적 근거이든, 개인에게 맡겨진 자유가 아닐까 싶어요. 스스로 자신의 답을 찾고, 그 속에서 자신을 찾는 거죠. 이 책에 나왔던 수많은 철학자들처럼요. 그런 본인의 생각을 글과 말로 남기고 자신의 말에 따라 책임 있게 살아간다면, 누구나가 다 철학자가 되는 거죠. 멋지네요. 철학 소설을 읽고 저도 소설을 쓰고 있네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