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민신문고에 제안하는 글을 썼다. 기부나 봉사에 대해 체계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정부 사이트를 운영했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생각보다 주위에서 기부하고자 하는 마음과 관심은 있지만 기부처에 대한 불신과 정보의 부족으로 기부를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사람마다 돕고 싶어 하는 사회적 취약 계층이 다 다르고 기부하고자 하는 방법도 다른데 그 모든 정보들을 개인이 알아보지 않으면 종합적으로 알기가 쉽지 않았다. 나도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내가 원하는 조건의 기부처를 찾는 것이 꽤 어려운 일이라고 느꼈다. 예를 들어 집에서 가까운 미혼모 시설이면서 아기 물품을 받아주는 곳을 찾기 위해서는 인터넷 검색과 지도 검색을 한 뒤 모두 전화해봐야 하는 것이다. 요즘 아동학대 피해 아동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높아져서 주위에서 피해 아동을 도울 수 있는 방법들을 찾고 싶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하지만 어디가 신뢰가 가는 기부처인지, 어떤 곳이 어떤 나이대의 물품을 받는지 알지 못해서 기부를 포기하는 경우도 많이 본다. '아름다운 가게'를 포함해서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는 기부처들도 많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은 도움이 필요한 시설이나 사람들도 정말 많다. 기부하고자 하는 사람이 원하는 조건을 필터링하면 기부처에서 올려놓은 필요 요건에 따라 적절한 기부처가 추천되는 사이트가 있으면 좋겠다. 이토록 기술이 발전한 국가에서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다. 나는 하나님이 내게 남보다 넘치는 무언가를 채워주시는 이유는 다른 사람과 나누라고 주시는 것이라고 믿는다. 세상 사람 모두가 각자에게 넘치는 부분을 그것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서로 나누며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모두에게 보다 넉넉하고 풍요로운 곳이 되리라 생각한다. 또한 내가 다 가지면 나만 행복할 것 같지만 결국 지구를 공유하며 같이 사는 다른 사람도 행복해야 나 자신도 온전히 행복해질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살아가는 동안 나눌 수 있는 용기가 나는 만큼 최선을 다해 나누는 삶을 살고 싶다. 물론 자기 먹을 거 입을 거 아껴가며, 또는 자신의 삶 전체를 헌신하며 다른 이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부끄럽다. 하지만 그런 고귀한 삶을 꿈꾸며 점점 닮아가고 싶다. 나의 기부가 시작된 것은 스무 살 때부터이다. 그때는 학교를 다니며 과외해서 생활비를 충당하던 때라 금액은 조금밖에 기부하지 못하고 대신 재능 기부를 했다. 나는 운이 좋게 스무 살 때부터 부촌에서 고액 과외들을 할 수 있었다. 과외를 하며 내게는 작은 불편한 마음이 있었다. 내가 결국 부자 부모를 가진 아이들만 더 잘 되는 사회에 기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래서 그때 결심한 게 과외를 하는 한 반드시 교육 기회가 적은 저소득층 아이들을 가르치겠다는 것이었다. 바쁠 때는 과외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주 5일을 수업하고, 남은 이틀은 교육 봉사를 하는 날도 있었다. 솔직히 버거웠지만 내게 버거운 건 과외수업을 하는 순간들이지 봉사 수업을 하는 순간들은 아니었다. 때때로 내게 과외를 받는 학생이나 학부모에게 마음을 다칠 때면, 교육 봉사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숱한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내가 가르친 어떤 중학생은 할머니 손에서 자랐는데 본인이 아픈 할머니를 돌보는 한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정말 대견스럽게도 수능 하나 틀리고 국내 최고의 한의대에 입학해 한의사가 되었다. 이처럼 꼭 대단한 성과를 내지 않아도 어려운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해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는 아이들을 통해 큰 보람과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교사 임용 시험을 준비하며 과외들을 정리하고 교육 봉사를 모두 그만두었다. 그리고 교사가 된 이후 아이들을 키우면서는 시간을 내지 못하고 기부금만 조금씩 늘려가고 있다. 우리 부부는 처음 결혼했을 때 가정 재정에 대해 의논하면서 기부처에 대해서도 의논을 했다. 결혼 전에 나는 외국 빈민국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동의하면 기부처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런데 남편은 국내에도 어려운 아이들이 많은데 왜 외국 아이들부터 도와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했고 우리는 이 문제로 결국 크게 싸웠다. 나는 우리가 빈민국일 때 선진국으로부터 받았던 도움을 지금이라도 갚아야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어려운 아이들도 어느 정도 복지가 보장되지만 외국은 말 그대로 '굶어 죽는' 아이들이 있기에 그 아이들이 먼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남편은 가급적 우리가 아는 사람과 같이 가장 가까운 이웃부터 돌보는 게 먼저라고 주장했다. 일주일간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다가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나는 이미 오랫동안 적은 금액이지만 기부를 해왔고, 누구를 도와도 돕는 게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남편은 이제 막 나와 결혼해서 처음 기부를 시작하니 기부가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남편에게 먼저 누군가를 돕는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하는 게 맞겠다.' 그래서 남편에게 가장 마음이 가는 아이들은 물으니 국내 결식아동과 장학 사업이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 부부의 첫 기부처가 정해졌다.
이후 첫째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다운증후군 고위험군 판정이 되어 부부가 눈물로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앞으로 다운증후군 아이들을 후원하겠노라 하나님께 약속했다. 다행히 첫째는 건강히 태어났지만 그 이후 다운증후군 아이들을 위한 기부가 추가되었다. 첫째를 낳고 키우다 보니 이건 남편과 친정엄마까지 붙어 같이 육아를 하는데도 몸과 마음이 다 무너지는 시간이었다. 신생아를 키우는 미혼모나 미혼부들은 얼마나 힘들까 자주 그들이 생각났다. 그래서 미혼모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둘째를 낳을 무렵 온 나라가 지독한 아동학대로 떠들썩했다. 잠이 안 오고 분노가 치미는 그런 믿을 수 없는 사건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아동학대를 위한 후원처를 찾다가 우리는 처음으로 '아동일시보호소'라는 것이 있는 걸 알게 되었다. 가정폭력 등으로 부모에게 격리된 아이들이 보육원이나 거처가 확정되기 전에 일시적으로 머무는 곳이었다. 보육원보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금액을 후원하다가 작년 성탄절에 뭔가 특별한 선물을 하고 싶었다. 코로나 가운데 아동학대가 급증하면서 아동일시보호소에 들어오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 일하시는 분들도 아이들도 힘들다는 뉴스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곳에 머무는 아이들이 내 아이라면,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내 직장 동료라면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을까 생각해 보았다. 내가 먹어본 가장 맛있는 간식을 특별히 선물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감사하게 남편도 나와 의견이 맞았고, 이 금액은 둘이 모아둔 용돈으로 진짜 선물을 하기로 했다. 아이들 연령대와 직원분들 취향을 고려해 각자 다른 간식들을 주문했다. 돈만 보내는 것보다 다소 번거롭게 느껴졌다. 그동안 우리 부부는 실제 시간을 들여 몸으로 하는 봉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린아이들을 낳고 키우느라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아이들이 좀 자라야 아이들을 맡겨놓고 우리가 봉사라도 다닐 수 있겠지 막연한 핑계를 대며 미뤘다. 그래서 우리는 그동안 기부금으로 이웃을 돕는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우리가 낸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 눈으로 보거나 느끼지는 못했다. 그런데 우리가 간식을 보낸 아동일시보호소 팀장님께서 아이들이 간식을 맛있게 먹는 사진을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해서 보내주셨다. 엄청 신나 보이는 그 모습에 그동안 기부금을 낸 것과는 다른 큰 기쁨을 느꼈다. 남편도 매우 좋아했다. 우리의 작은 성의와 노력이 이 아이들과 그곳 직원분들에게 잠시 기쁨을 선물했다니 뿌듯했다. 더 열심히 벌어서 더 많이 나누고 살고 싶다는 의지가 충만해졌다. 돕고 싶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내가 미국에서 외국인이었을 때 나를 차별하고 괴롭힌 사람들도 많았지만, 기꺼이 나를 집에 초대하고 시간 내어 나와 교제하고 쇼핑센터까지 데리고 다녀준 친구들도 있었다. 나도 우리나라에 있는 외국인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싶다. 또한 어쩌면 이 나라에서 외국인보다 더 이방인 취급을 당할 새터민(탈북자)들에게도 따뜻한 도움을 주고 싶다. 위에 후원하는 아이들에게도 직접 시간을 내 찾아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몸으로 봉사하고 싶다. 우리 학교 우리 반에도 매번 여러 명의 저소득층 아이들이 있다. 때로 나라에서 지원하는 요건이 안 되는 상황이 있다. 담임인 나라도 좀 도울 수 있나 알아보니 담임인 내가 후원하는 것은 김영란법에 어긋난단다. 교사도 교원평가 대상자인 게 이유라는데 이 부분은 좀 불합리하다고 느꼈다. 계속 마음에 걸리던 예전 담임반 아이가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원하던 전공의 대학을 입학했다고 연락 왔다. 졸업생이기에 김영란법에서 자유롭지만 혹시 몰라 다른 기관에 지명 후원을 해서 소정의 장학금을 보냈다. 조금 더 형편이 나아지고 내 것에 대한 욕심이 더 줄어들어서 우리 반 아이 한 명쯤은 대학 첫 등록금을 내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꿈이 생겼다. 전에 칸트가 선행도 결국 자기만족을 위한 이기심이라고 말했던 것을 읽은 적 있다(과연 내가 잘 이해한 것인가). 맞다. 결국 나의 기쁨과 더 나은 삶의 질을 위해 나는 기부하고 봉사한다. 하지만 그런 이기심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더 이기적인 인간이 되고 싶다.
*제가 기부하는 곳은 "경기남부아동일시보호소"입니다. 이곳은 기부금은 기부영수증 처리를 해주고, 다양한 연령대의 헌 옷이나 아이들 물품도 기쁘게 받아주세요. 혹시 기부처를 찾아보고 계시다면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시거나 전화해보시길 바랍니다! (031- 445-7188) *제가 올린 국민신문고 제안을 안전행정부에서 채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꼭 실현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