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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돌의 지혜 Apr 04. 2022

쉽게 미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늘 미안해하는 워킹맘인 나, 괜찮은 걸까

  마음으로 따르던 선배 선생님께서 이직을 하신 후 몇 년 만에 만남을 가졌다. 둘 다 코로나에 아이들을 키우며 일하다 보니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만날 수 있었다. 보고 싶던 선생님을 만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어린아이처럼 그간 내 삶에 있었던 일들을 하소연했다. 그리고 내 입 밖으로 나가는 나의 말들을 통해 그간 내가 학교에서는 육아하느라 또래 동료 교사처럼 일에 전력을 다하지 못하는 아쉬움과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고, 집에서는 일하느라 전업 엄마처럼 아이들을 충분히 잘 돌보지 못한다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당연히 선생님도 나와 같은 워킹맘으로서 그런 마음을 안고 살아가실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선생님의 대답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전혀 미안하다는 생각 하지 않는데요?"


  내 이야기를 듣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아이들에게도 내가 쓴 보고서를 일부러 보여주고 엄마가 어떤 일을 하는지 자주 들려줘요. 엄마가 이렇게 사회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야. 엄마 멋지지? 너희도 나중에 사회에서 이렇게 중요한 일들을 해나갈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이렇게 말해요. 부모가 각자 자신의 최선 안에서 아이들을 키우면 그걸로 충분한 거 아닌가요? 다른 부모와 비교하며 내가 주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미안해하는 것이 아이들에게도 좋지 않을 거 같아요. 나는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주는 거고 그것을 잘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은 아이들 몫이죠. 아이들이 커서 부모에게 받지 못한 것을 원망한다면 그게 주지 못한 내 탓일까요? 부모에게 받은 것을 감사히 여기지 못하는 그 아이들 탓이라고 가르칠 것 같아요."


  선생님의 말을 들으니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선생님은 나보다 훨씬 바쁘게 일하시는데도 스스로와 가족들에게 당당한 태도를 갖고 계셨다. 그리고 일과 가정 모두에서 충만감과 행복감을 느끼시는 듯했다. 선생님을 만난 후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모든 역할에서 완벽한 이상향을 그려놓고 끊임없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스스로를 자책하고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전업 엄마들처럼 등하원을 직접 하지 못하고 요리나 놀이에서도 늘 부족한 엄마이고 한정된 돈과 시간으로 세상의 모든 좋은 경험들을 다 시켜주지 못한다며 늘 미안함을 느낀다. 남편에게도 완벽한 내조를 하지 못하는 아내이고, 시부모님의 기대만큼 순종적이지 못한 며느리이고, 부모님에게도 경제적으로 호강시켜드리지 못하는 딸이다. 직장에서는 일한 시간보다 육아휴직을 한 시간이 더 긴 막내이고, 야근이 두려워 주어진 일 외에 새로운 프로젝트에는 늘 몸을 사리는 젊은 교사이다. 나의 이런 생각들은 늘 모두에게 지나치게 미안해하고 위축된 태도로 이어진다. 쉽게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고 자주 과도하게 예의를 가장해 굽신거린다.


  그런데 나, 정말 미안해야 하나? 


  아이들에게 일하는 엄마로 경제적으로 더 여유로움을 줄 뿐만 아니라 교육학을 전공한 교육전문가 엄마가 있다는 것은 굉장히 든든한 일 아닐까? 다른 직업에 비해 야근도 잦지 않고 방학도 보장되어 있어 일하면서도 이만큼 직접 아이들을 돌볼 수 있으니 일하는 엄마 중에는 꽤 아이들과 시간을 함께 하는 엄마일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간단하게나마 직접 조리해서 아이들 건강한 음식 먹이려고 노력하고, 주말에는 어떻게든 데리고 나가고 아이들 중심으로 시간을 보내려 하는 것도 꽤 괜찮은 엄마 같은데?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자라서 내 딸도 워킹맘이 될 수 있고 내 아들도 일하는 아내를 만날 수 있는데 내가 좋은 역할 모델이 되어준다면 그거야 말로 최고의 교육일 것이다. 


  남편에게도 맞벌이만큼 좋은 내조가 어디있담? 실제로 경제적으로 함께 부담을 나눠주면서 퇴사하고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 말리지 않고 지지해줬으니 어디 가서 나 같은 아내를 찾을 거야. 


  시부모님에게도 손녀 손자 안겨드리고 매주 얼굴 보여드리는데 이 이상 효부를 기대하시면 그게 욕심이시지. 우리 부모님에게도 경제적으로 호강은 못 시켜드려도 평생 어디 가서나 자랑할만한 딸로 자부심 안겨드렸으니 최고의 효도를 했다. 자식이 행복하게 잘 사는 게 부모에게 제일 큰 기쁨이라는데 그렇다면 더더욱 잘하고 있고. 


  직장에서도, 꼭 야근을 많이 하는 교사가 학교에서 필요한 훌륭한 교사인가? 야근은 가급적 하지 않지만 항상 교무실에 가장 먼저 출근해서 할 일을 한다. 단 한 번이라도 내가 아이들을 키운다는 이유로 내게 맡겨진 업무나 수업을 소홀히 한 적이 있나? 얼마 전에도 부장님께서 나에게 같이 일해보니 탁월한 사람이라며 칭찬해주셨다. 학교에서도 가장 부담된다는 주요 업무들을 몇 개씩 맡아서 잘 감당했고, 항상 두 학년이나 두 과목 이상의 수업을 잘 가르친다는 평가 들으면서 해왔다. 담임으로 다른 담임선생님들 못지않게 일 년 내내 아이들 상담하고 챙겨 왔고 평생 만난 선생님들 중에 가장 좋았다는 편지도 매년 받는다. 비록 새로운 일을 만들어서 해내는 상황은 아니지만 어차피 앞으로 30년은 일할 건데 오죽 일 잘할까. 아이를 키우지 않는 선생님들 중에서도 각자의 사정으로 또는 태만으로 나보다 일 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주어진 출퇴근 시간 이내로 최선을 다해 일하는 것은 물론이고, 늘 그 시간 이상으로 일에 에너지를 쏟고 있는데 왜 내가 미안해해야 할까. 


  착한 사람 콤플렉스, 완벽주의, 가스 라이팅 같은 것을 경계하자. 스스로 좋은 사람이어야만하고, 완벽해야만 한다는, 나 자신과 외부의 압박에 예민하게 굴자. 오은영 선생님이 사람은 어느 정도 자기 잘난 맛으로 살 때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나와 가족이라서 내가 우리 학교 교사라서 그들도 행복할 것이라는 근거 있는(!) 자신감을 갖자. 나에게 계속해서 더 요구하는 모든 관계와 상황 속에서 쉽게 미안해하지 말고 스스로를 잘 돌보고 지켜야겠다. 


  좋은 사람과의 만남은 늘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한다. 그래서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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