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게 물든 '댑싸리'로 가을을 기억하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사진첩에 꽃 사진이 많아진다고 하죠.
최근 배우 유승호 님이 30대가 되고 꽃과 풀이 좋아지기 시작했다며, 메신저 프로필에 꽃 사진을 올렸는데 주변 사람들의 만류로 내렸다는 이야기를 하셨더라고요. 귀여운 일화였습니다만, 영 남일 같지 않았어요. 20대 후반인 제 사진첩도 꽃과 풀의 지분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거든요. 정말 나이가 들수록 꽃과 풀이 좋아지는 걸까요? 사실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혹자는 스스로가 꽃 같을 때에는 주위의 꽃이 보이지 않다가, 내가 꽃이 아님을 알게 되면 주위의 꽃이 예뻐 보인다고 하는데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말은 아닙니다. 젊음을 곧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삼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저만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는 나이가 들수록 꽃과 자연을 즐기게 되는 이유가 '흘러가는 시간을 잠깐이라도 붙잡고 싶어서'라고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제 어린 시절은 하루하루 시간이 참 느리게 흘러갔어요. 난 빨리 멋진 어른이 되고 싶은데 초등학교는 왜 6년이나 다녀야 하는 건지. 6년이 꼭 60년 같이 느껴졌다니까요. 그땐 계절이 바뀌어도 그냥 그런가 보다 했어요. 여름이 오면 그저 물놀이할 수 있어서 신나고, 반대로 겨울에는 실컷 눈싸움할 수 있어 좋았죠. 아, 제 생일이 가을이라 그래도 사계절 중엔 가을이 제일 기다려졌던 것 같네요.
어른이 되니 알겠더라고요. 왜 엄마가 입버릇처럼 '하루가 어떻게 가는 줄 모르겠다' 했었는지. 누군가 시곗바늘을 잡고 뺑뺑 돌리는 것처럼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어요.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이 오늘 같고. 계절이 바뀌어야 비로소 시간의 흐름을 체감하게 돼요.
그런데 특정 계절에 피어나는 꽃이나 그 시기에만 볼 수 있는 자연경관을 눈앞에 두면 다른 감정이 느껴집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을 조금 더 오래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빠르게 흘러가던 시간이 잠시 멈춥니다.
지난 주말에는 문득 창밖을 보니 울창한 나무의 끝자락이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었어요. 그래서 냉큼 수원으로 떠났죠. 올해 가을엔 꼭 댑싸리를 봐야겠다고 마음먹었거든요.
싸리비를 만들 때 사용하는 댑싸리는 친숙한 이름, 용도와 달리 이국적인 풍경을 선물하는 식물입니다. 여름 내 초록빛이었다가 가을이면 온몸을 붉게 물들이는데요. 울긋불긋 물든 댑싸리 군락지는 최근 유행하는 핑크뮬리 못지않게 아름다워요. 작년 스치듯 봤던 댑싸리가 기억에 남아서 올해는 꼭 댑싸리를 제대로 구경해야지 했답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수원에 위치한 탑동시민농원. 댑싸리 밭으로 유명한 곳은 아닌데, 천일홍과 억새를 함께 즐길 수 있어 가을을 누리기 좋은 곳이랍니다.
댑싸리가 자리 잡은 곳은 농원 가장 안쪽이었는데요. 아직 본격적으로 물들기 전이라, 누군가 붉은 물감을 콕콕 떨어뜨린 것처럼 군데군데 붉게 물들어 있었어요.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었죠. 저는 그 장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연달아 사진을 촬영했어요. '기억'을 저장하기 위해서요.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기억의 밀도가 높지 않아서'라고 합니다. 우리 뇌는 새롭거나 특별한 경험을 한 순간을 '기억'으로 저장하는데요. 기억의 밀도가 높을수록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고 해요. 온통 새로운 것들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는 어린이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도 이 이유이지요. 반대로 익숙한 일들에 둘러싸인 어른들은 기억할만한 순간이 많지 않아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고 느끼게 됩니다.
꽃과 자연은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기억을 저장하기에 참 좋은 대상입니다. 늘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니까요. 피어나는 시기를 잘 맞추지 못하면 구경조차 할 수 없죠. 운 좋게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하면 머릿속과 마음속에 잘 저장되어 오래도록 남게 됩니다.
저에겐 2023년의 초가을이 군데군데 붉게 물든 댑싸리로 기억될 예정입니다. 내년 이맘때, 싸늘해진 가을바람을 맞으면 붉게 물든 댑싸리를 떠올리며 잠시 저의 시계를 멈추게 될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도 사진첩에 많아지는 꽃 사진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시간을 성실하게 기억하려 노력하고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