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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원형 Feb 19. 2022

오늘은 우수



웅크렸던 어깨가 펴지고 언 땅이 녹으며

여린 싹들이 올라올 때도 멀지 않았다.

예전에는 봄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노곤하고 졸립기도 하고 그래서 흐리멍텅해지는 계절이라는 편견을 지닌 채 봄을 맞곤 했다.

언젠가부터 봄도 좋다. 계절이 다 좋다.

봄이니 이제 추위에서 벗어나서 좋고 여름은 ...

생각하니 요새는 여름이 너무 더워서 아주 좋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염천에 땀을 한 사발 쏟고나면 얼마나 개운하고 좋은데...

거기다 수박, 수박의 계절이니 좋다.

가을이야 싫어할 사람이 별로 없을 계절이고

겨울은 알싸한 기온이 일단 맘에 든다.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긴 해도 겨울이 또 좋은 건 기러기며 겨울 철새들이 오기 때문이다.


색깔도 그렇다. 어릴 적에는 노란색을 좋아했다.

어느 땐가 노란색을 좋아하면 질투가 심하대, 

친구들이 하는 얘기를 들은 뒤로 좋아하던 티를 안 냈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울트라 마린, 코발트 블루, 네이비 블루, 트루 네이비...

파랑에 꽂히고 보니

어려서부터 파랑도 무척 좋아했다는 걸 알게 됐다.

파랑계열의 옷이 유난히 많다.

녹색도 진홍색도 좋고 주황색도 좋고

갈색도 올리브색도.. 결국 나는 모든 색을 다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오전에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UN/LEARNING AUSTRALIA 강연을 들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주최하는 행사인데

한국과 호주수교 60주년 기념 행사의 하나로 열린다기에

호주 선주민들의 예술에 관한 이야길 들을 수 있으려나 기대하고 신청했다.

영국 식민지였다가 이민자들을 대거 받으며 다민족 국가가 돼 버린 호주는

아태지역에 속하지만 유럽의 영향력하에 있기도 하고..

그 와중에 선주민들은 엄청나게 사라지고 그 가운데 호주에서 활동하는

한국 입양아 출신의 예술가 이야기까지

예술로 세계를 연결하는 작업에 관한 이야기로 들었다.


오후엔 다큐 The Magnitude of All Things를 봤다.

호주 산불로 숲이 불타고 살던 집도 불탄 어떤 이는

환경운동가로 변신한다.

정부가 기후로 인한 산불이 아니라며

그런 말은 정부를 비난하는 말이라는 소릴 듣고 운동가가 되었다.

통째로 사라지고 불타 버린 나무만 지키고 있는 숲에는

정적이 감돈다. 

숲이 있던 곳을 거닐다 오면 팔뚝이며 몸에 겁댕이가 묻는데

그게 숲이 하는 이야기로 들었다는 말에

영화를 보다 말고 눈물을 쏟고 말았다...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은 텅 빈 숲 바닥으로 기어가는 개미를 발견하고는

얼마나 경이로웠는지.. 그 말이 내 귀에 들리는데

어떤 기분인지 아주 조금 알 듯 했다...

개미를 시작으로 생명은 또 숲으로 하나 둘 찾아올 텐데

그 숲이 다신 불타지 않을 수 있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기후 위기가 지금과 같은 속도라면

언제고 또 벌어져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기도 하다.


호주 산불을 단순한 산불 그 너머의 사건으로 인식하진 못했다.

코알라가 불타죽는 장면은 이미 몇 년 전부터 해마다 호주 산불로 벌어지는 걸 봤어도

볼 때마다 견디기 어려웠다. 몇번 관련한 글을 쓰기도 했지만

세계 곳곳에 너무 많은 기후 관련한 재난이 벌어지다 보니 좀 무감해진 탓도 있고

호주는 세계적인 석탄 수출국이다보니

복잡한 감정들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무엇보다

그곳에 살고 있는 이들의 마음까지 헤아리지는 못했던 것 같다.

산불에 강풍이 불면서 집이 사라진 이재민들의 마음을 헤아려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마존 파괴의 현장에서 저항하는 선주민들은

세계일화를 이야기한다.

연못도 살고 싶어해요, 라는 말을 하는데

연결된 세상을 이들은 체득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산호를 연구하는 찰리 베론의 진정어린 마음도

툰베리의 이야기도 

멸종반란의 한 멤버는 잡혀가도 좋아.

감옥에서 죽어도 좋아. 내 아이들의 미래를 지켜줄 수 있다면..이라고 하는 대목에서

또 울컥했다..


토요일 오후 혼자 집에 있으면서

영화도 보고 그림도 그린 주말을 즐겼다.


오늘은 "우수"

해서 벚나무를 그려봤다.

곧 꽃눈이 흩뿌릴 날이 찾아올 테고

꽃비 내리고 좍좍 초록 주먹들이 펴질 무렵 녹음의 여름으로 갈 테지


오전에 보고 들었던 미술작품들과 이야기,

그리고 오후에 본 영화는 서로 씨줄과 날줄로 내 안에서 직조되었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

토박이로 살던 선주민, 이민을 온 이민자들 그리고 이역만리로 입양된 이까지 다양한 이들의

차이점을 인정하는 일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

산불이 나서 집이 다 타버린 사람, 기후 문제의 심각성에 더 예민했던 툰베리, 해외 출장 중 딸의 익사 소식을 접한 찰리 베론,

이후로 산호초 연구에 생을 바친다..

해양산성화로 폐허가 되는 산호초를 세계 최초로 세상에 알린 베론

그래서

세상의 연결성을 이해하는 것


이 시각즈음 되면 꼭 졸립다

오후 11시를 훌쩍 넘겨 자정을 향해가는 자시..는  '자'야할 '시'간

해서 이만 마무리


202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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