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활용한 글쓰기-판타지소설(8)
에리스 뤼튼 영애는 파티장의 구석에서 긴장한 채 거울을 바라보았다. 짙은 화장을 하고, 과하게 꾸민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어색해 보였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웠다.
하지만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 집안을 살리기 위해선 이 파티에서 부유한 영식의 마음을 얻어야 했다. 최근에 광석을 발견해 졸부가 되었다는 하트레일 영식은 그 후보 중 하나였다. 그렇게 다짐하며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커튼 너머로 낮고 비열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거 봤어? 뤼튼 영애? 어울리지도 않는 화장을 하고 정말 우스꽝스럽지 않니?"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또 다른 여성이 히죽거리며 답했다.
"그러게 말이야. 한미한 집안 여식이 어쩔 줄 몰라서 저러는 거겠지. 저런 꼴로 대체 누구를 꼬시겠다는 건지 몰라. 설마 하트레일 영식 같은 사람이 넘어갈 거라 생각하나?"
남자의 비웃음이 이어졌다.
"하트레일 영식? 그가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저런 여자를 고르진 않겠지. 단순 놀이감으로 삼으면 모를까."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에리스는 숨을 멈췄다. 손이 떨렸고, 가슴이 조여오는 듯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들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모든 힘이 빠져나간 듯 발걸음은 무거웠고, 입술은 닫힌 채였다.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던 에리스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파티장 뒤편의 발코니로 향했다. 커튼 뒤로 숨듯 나가자 차가운 밤공기가 그녀의 얼굴을 스쳤다. 깊은 숨을 내쉬며 눈을 감은 그녀는 억누르려 했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왜...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지..."
자신을 조롱하는 목소리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끝없는 수치심과 분노에 휩싸였다. 결혼 상대를 사로잡겠다며 한껏 힘을 주어 한 화장이 점차 눈물에 씻겨 지워지고 있었다.
그 순간, 번쩍 하는 빛이 나더니 발코니의 어둠 속에서 부드럽지만 강인한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에리스. 울지말고 내 얘길 잘 들어."
깜짝 놀라 뒤돌아본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 낯선 여인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 얼굴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그녀는 자신보다 성숙하고 차분해 보이는 여인을 마주했다.
"누구... 누구시죠?"
에리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여인은 싱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너야, 에리스. 20년 뒤의 너."
에리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러섰다.
"이게 무슨 소리죠? 당신이... 나라고요? 믿을 수 없어요."
미래의 에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야. 그리고 지금의 네가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외로운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아. 그건 내가 이미 겪은 일이니까."
에리스는 한숨을 쉬며 주저앉았다.
"그럼 내가... 앞으로도 이렇게 비웃음만 당하며 살게 되는 건가요?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애써도 결국 실패하는 건가요?"
미래의 에리스는 천천히 그녀의 곁에 앉으며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오늘 파티에 결국 하트레일 영식이 자신을 선택했다는것, 그가 졸부가 된것이 모두 부풀려진 소문이라는 것, 결국 20년 결혼 생활 후 철저히 배신당하고 남편인 하트레일 영식의 정부에게 살해당한다는 믿지 못할 얘기를 들려주었다.
미래의 에리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어떻게 20년 전 지금으로 돌아 온건지 나도 몰라. 그러나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건 그들이 비웃는 건 네가 약해서가 아니야. 네가 그들보다 더 강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그러니 그들의 말에 흔들리지 마. 너는 네 자신을 더 사랑하고, 너에게 맞는 선택을 해야 해. 그것이 네 운명을 바꾸는 첫걸음이 될 거야."
에리스는 미래의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마음속에 작은 불씨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미래의 에리스는 과거의 자신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내가 너에게 힘을 줄게. 네가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그리고 더 이상 아무도 너를 짓밟지 못하도록 만들게."
그 순간, 발코니 위로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두 사람은 그 빛에 휩싸이며 하나가 되었다. 기억이 융합되고, 과거의 에리스의 눈에는 20년 뒤의 통찰과 지혜가 담겼다. 그녀는 과거의 실패와 배신, 그리고 죽음의 순간까지 모든 기억을 받아들였다.
눈을 뜬 에리스는 울어서 엉망이 된, 우스꽝스러운 화장을 지웠다. 대신에 수수하지만 자신에게 맞는 화장으로 다시 고친 후, 발코니 문을 열고 파티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의 움직임은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전생에 일어난 모든 일이 선명히 떠올랐다. 하트레일 영식의 다정했던 목소리, 부드러운 미소,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결국 그녀를 배신하고 죽음으로 내몰았던 가식이었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그리고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하트레일 영식과 엮이지 않는 것, 미래에 예견된 비참한 죽음을 피하는 것이었다.
그는 멀리서 그녀를 보고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뤼튼 영애, 오늘 밤 당신은 누구보다 빛나시는군요."
에리스는 그의 부드러운 말투와 다정한 미소에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그 미소 뒤에 감춰진 비열함과 냉혹함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렇군요, 하트레일 영식. 하지만 빛나야 하는 것은 진심이고, 가식은 금방 어두워지기 마련이죠. 듣자하니, 최근에 발견했다던 그 광석들이 사실은 금이 아니라 금처럼 보였던 황화철이라는 얘기가 있던데 사실인가요? 채굴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신붓감을 구하는 거라면... 저는 사양할게요"
하트레일은 순간 멈칫했다. 에리스는 순수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내용은 그의 최측근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가산이 줄어 한미한 집안의 영애이지만 명맥만큼은 유서 깊은 집안. 그녀와 결혼해 그 가문의 이름을 빌어 귀족들의 투자금을 얻을 계획이었던 그는 입이 쓸 수 밖에 없었다. 꾀어 내기 쉬울줄 알았던 에리스의 눈빛은 마치 그의 내면을 꿰뚫는 듯 날카로웠다. 그는 애써 웃으며 물러섰다.
에리스는 파티장 중앙으로 걸어가며 그녀를 비웃던 무리들 쪽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여전히 그녀를 보고 히죽거리며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개중에는 아까보다 수수하지만 어딘가 고귀해 보이는 변화를 눈치 챈 이들도 있었다.
에리스가 무리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를 힐끗거리며 웃음을 참지 못하던 한 여자가 먼저 작게 속삭였다.
"저 드레스, 지난 시즌 거 아닌가? 정말 고귀한 척은…."
그러나 다른 이가 그녀를 꼼꼼히 살피며 눈썹을 찌푸렸다.
"근데… 이상하지 않아? 저 얼굴… 아까랑은 다르게 보이지 않아? 저렇게 생겼었나?"
다른 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꾸했다.
"글쎄… 화장을 옅게 해서 그런가?확실히 평소보다 더 고급스러워 보이긴 하네. 피부가 저렇게 맑았던가?"
"뭐야, 저 여자가 원래 이렇게 예뻤어? 내가 아는 에리스가 맞아?"
"분명 평소엔 이렇게 눈에 띄지 않았는데…."
에리스는 그들의 수군거림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고개를 높이 든 채 당당히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태도는 무리에게 은근한 압박감을 주었다. 조롱하던 웃음이 점차 희미해지고, 경외와 질투가 섞인 침묵이 흘렀다.
에리스는 그들의 앞에 서서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그들은 순간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가요? 저도 좀 들어도 될까요?"
여자들 중 한 명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그냥 파티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어요, 뤼튼 영애. 그런데 아까와는 다르게... 정말... 멋지네요. 굉장히 노력하셨나 봐요?"
에리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노력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죠. 하지만 그 칭찬이 가식이라면, 칭찬하는 이의 진심 없는 노력은 안타깝지 않을까요?"
여자는 얼굴이 굳었지만, 억지로 미소를 유지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네요."
에리스는 조금 더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
"모르시겠다면 다행이군요. 자신의 무례함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으니 말이에요. 어쩌면 그게 행복일지도 모르죠."
주변에 있던 다른 여자들이 숨을 삼켰다. 말을 돌리려던 또 다른 여자가 말을 꺼냈다.
"뤼튼 영애,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건 아니겠죠? 저희는 그냥 농담을..."
에리스는 그녀의 말을 끊으며 미소를 지었다.
"농담은 상대가 웃어줄 때 의미가 있습니다. 제가 웃지 않는데, 그걸 농담이라고 부르시다니... 용감하시군요."
말이 끝나자마자, 그들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주변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여자들은 당황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에리스의 날카로운 말과 당당한 태도에 그저 억울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여자들은 각자 다른 핑계를 대며 자리를 떠났다. 누구도 그녀의 말에 반박할 용기가 없었다. 그들은 분명 마음속으로 분노하고 있었지만, 에리스의 태도와 날카로운 지적에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에리스는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자신이 아니었다. 비웃음과 조롱 앞에서 움츠러들던 소녀는 사라졌고, 그 자리에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여인이 서 있었다.
그날 밤, 에리스는 하트레일 영식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고, 자신을 비웃던 사람들의 입을 막았다.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었다.
"내 운명은 내가 만든다."
그녀는 당당히 파티장을 걸어 나갔다. 그녀의 발걸음 뒤로는 누구도 다시는 그녀를 비웃을 수 없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