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잊혀진 자들의 하루

질문을 활용한 글쓰기-판타지소설(7)

by 슬기로운힘나

2075년의 서울은 기술과 인간성이 충돌하는 거대한 실험장이었다. 잊힘의 알약, 공식명 ‘미리너리(Mirinary)’는 사이버 폭력과 디지털 유출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개발된 발명품이었다. 하지만 이 약은 단순한 치유제가 아니었다. 단 하루 동안, 복용자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들이 남긴 상처는 그대로지만, 존재는 공백으로 지워졌다.


잊힘의 알약은 희망과 동시에 절망의 상징이 되었다. 2020년대부터 꾸준히 증가하던 20~30대의 자살 사건이 2030년대에 들어 폭발적으로 급증하면서 디지털 생명권 보장을 위한 해결책으로 이 약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 명의 생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기획된 이 약은 아이러니하게도 범죄자들에게 새로운 도구를 제공했다. 살인, 사기, 그리고 디지털 성범죄자들은 약을 복용한 채 흔적을 남기지 않는 유령이 되어갔다.


결국 정부는 약의 악용을 막기 위해 ‘잊힘의 알약 복용 등록법’을 제정했다. 복용자는 정부24에 사전 등록을 해야만 약을 구입할 수 있었고, 사용 목적과 시간, 복용 후 이동 경로를 제출해야 했다. 모니터링 기능도 탑재하게 된 정부24는 약 복용 중 발생하는 모든 활동을 감시하며 기록으로 남겼지만, 범죄자들은 여전히 그 사이를 교묘히 파고들었다. 기술은 윤리를 압도했고, 서울은 점점 잊힌 사람들로 넘쳐났다.


날, 케이팝 최정상의 스타인 유진은 정부24로부터 복용 승인을 받은 알약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녀는 한 달 전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인터넷 유출 사건 이후, 삶의 모든 의미를 잃은 상태였다. 동의 없이 유포된 영상과 사진은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그녀는 익명의 사람들에게 끝없는 공격을 받았다.


“단 하루라도… 나를 잊어줘.”


알약을 삼킨 유진은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똑같은 모습이었지만, 문을 나서는 순간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사람들은 그녀를 지나쳤다. 자신의 동영상을 유포한 전남친의 집 앞을 지날 때도, 그는 창문 밖으로 유진을 알아보지 못하고 낯선 시선을 보냈다.


유진은 처음에는 그 자유를 만끽했다.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해방된 기분은 날아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지하철 요금을 내지 않고 탑승했고, 거리의 카페에서 음료를 훔쳤다. 그러나 그 자유는 곧 허무함으로 변했다.


“진짜 나를 잊어버렸나 봐.” 유진은 혼잣말했다.


유진은 잊힘의 알약을 복용한 사람들이 자주 모인다는 낡은 폐공장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처럼 약을 복용한 사람들과 마주쳤다. 어떤 이는 범죄로부터 숨기 위해 약을 삼켰고, 어떤 이는 단순히 고독 속에서 사라지길 원했다.


그들 중 한 남자가 말했다. “잊혀지는 건 해방이 아니야. 단지 공백일 뿐이지. 네가 그 공백을 어떻게 채우느냐가 중요해.”


그날 밤, 유진은 자신을 잊은 사람들의 거리를 거닐다가 자신의 동영상 일부가 흘러나오는 전광판을 마주쳤다. 그 곳에는 그녀의 삶을 무너뜨린 그 사진과 동영상의 썸네일이 아직도 떠돌고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 싶었지만, 이제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가 사라져도 세상은 변하지 않아.”


그 순간, 유진은 결심했다. 잊힌 자로서 하루를 단순히 소비하지 않고, 행동으로 의미를 남기기로.


그녀는 폐공장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제안했다. “우리는 잊혀지지 않을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해요. 우리의 공백을 채우는 건 우리 자신이에요.”


유진과 잊힌 자들은 서울 곳곳에 퍼져 디지털 생명권의 중요성을 알리는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벽화, 메시지, 그리고 한순간 등장했다 사라지는 퍼포먼스들.


“우리는 잊히는 것을 선택했지만, 우리를 지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완전히 잊혀지기보다 새롭게 창조된 우리로 기억되길 원한다


그들의 메시지는 곧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단순히 초상권과 사생활이 유출된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하는 구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인터넷에 개인정보가 유출되고 재구축되는 사례가 빈번해지면서 자신을 능동적으로 지키는 새로운 운동이 되었다.


서울은 여전히 잊힘과 기억의 경계에서 흔들리고 있다.


유진과 잊힌 자들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메시지는 더 강렬해졌다.


“잊히고 싶어도, 결국 우리는 존재한다. 우리는 새롭게 태어날 권리가 있다”


서울은 기억 속에서, 그리고 잊힘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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