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적 유산을 아시나요
아기는 어떻게 생길까. 아빠와 엄마가 사랑할 때 아빠 몸 속의 정자와 엄마 몸 속의 정자가 만나 생긴다.
이제는 유치원생도 아는 이 임신 과정은 실은 말처럼 쉽지 않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임신은 그랬다. 아빠와 엄마는 사랑했지만 정자와 난자는 '좀처럼 만나지 못하거나' '만나서 헤어지기 일쑤'였다. 나의 난자는 마치 소개팅에서 모르는 남자를 만나 한 달 정도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고, 영화를 보며 '썸'을 반복하는 여성처럼 여러 정자들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쉽게 만나고 헤어지다
임신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그 다음 달 의외로 임신을 해버렸다. 그들이 만나 안정적으로 자궁 내벽에 달라붙은 것(착상 이라고 부른다). 나는 평생 '다낭성 난소 증후군' 이라는 질환 때문에 생리 주기가 불규칙했다. 한 달에 생리를 두 번 하거나 혹은 6개월 여를 무월경으로 보내거나. 그래서 대략 아무 날짜에나 맞춰 임신테스트기로 임신을 확인했다.
TV 드라마를 보면 많은 여성들이 가족과 함께 밥을 먹다 '우웩' 하며 화장실로 달려간 후 임테기를 시도하고 임신을 확인한다. 이런 경우도 있지만 나의 첫 임신은 이보다 복잡했다.
임테기에 두 줄이 나타나면 '임신', 한 줄이 나타나면 '비임신'이다. 하지만 나의 임테기에는 진한 한 줄과 집중해서 들여다봐야 볼 수 있는 '흐린 한줄'이 나타났다. (임산부들은 이를 '매직아이'라고 말한다.) 분명 두 줄인데 한 줄이 너무나 흐려 불량품이 아닐까 싶었다. 그 날 집에 오는 길에 두어개의 임테기를 더 구입했다. 하지만 추가 테스트에서도 결과는 같았다. 두 눈을 부릅뜨고 봐야 확인할 수 있는 '어렴풋한 임신'이었다.
성격이 급한 나는 결국 병원으로 향했다. 많은 여성들은 임테기로 임신을 확인한 후 2~3주 후 병원에 간다. 임신 5주, 6주차 정도에는 피검사를 통해서만 임신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착상이 된 후 아기는 자궁 속에 아기집을 짓고 그 곳에서 성장한다. 우리는 초음파 검사로 자궁 속에 아기집이 생겼다는 사실을 육안으로 확인해야 비로소 임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데 극초기에는 아기집이 아직 지어지지 않은 상태다.
때문에 임테기로 임신을 확인해도 2~3주 정도 기다렸다 병원을 방문하는 게 병원비도 아낄 수 있고 마음도 좀 더 편하다. 하지만 내 경우는 당장 다음 주에 예정된 저녁 술자리 약속이 너무 많아서 마냥 기다릴 수가 없었다. 임신이면 '금주'해야 한다. 스무살 이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다. 나를 병원으로 이끈 건 '술약속'이었다.
병원에 가서 곧장 피검사를 진행했다. 의사는 "수치가 보통 50 이상이면 임신이라고 보는데 나의 경우는 55라며 임신이 맞는 듯하니 2~3주 뒤 다시 병원에 방문하라"고 말했다. 55면 사실 매우 낮은 수치다. 피검사를 통해 임신을 확인한 임산부 사례를 보면 첫 수치가 수백~ 수천이 나온다. 임신이 맞다니 믿겠지만 수치가 낮은 게 의아해 주변에 알리지 않고 주말을 보냈다.
자궁을 도려내고 싶은 날
그리고 월요일 아침이 됐다. 그 날은 밤새 배가 아팠다. 생리통처럼 하체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생리통이 심할 때 가끔 나는 '자궁을 몸에서 도려내고 싶다'는 표현을 쓰는데 그 날이 그랬다. 왜 이렇게 배가 아플까, 정상인걸까? 밤새 인터넷을 검색해 본 결과 좋지 않은 징후였다. 다음 날 아침 샤워를 하러 욕실에 들어갔는데 생전 본 적 없는 양의 하혈이 시작됐다. 무섭다기보다 깜짝 놀랐다. 사실은 임신이 아니고 생리인걸까. 그렇다면 왜 이렇게 양이 많고 아픈걸까.
결국 이틀 만에 다시 병원을 찾았다. 의사와 간호사는 대수롭지 않게 "임신 초기에는 이렇게 흘러내리는 경우도 많아요"라고 말했다.
흘러내린다고?
처음 간호사의 언어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유산'이라는 불편한 단어를 쓰지 않고 유산을 말하는 재주를 가졌다. 피로 확인한 '아기'라는 존재는 그대로 다시 몸 밖으로 흘러나왔다고 한다.
"유산이라는건가요?"
명확하고 싶었던 나는 재차 물었다. 간호사는 "다시 피검사를 해서 확인해야 유산인지 알 수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또 다시 피검사를 했다. 임신, 출산 과정에서 내 피는 얼마나 많이 병원에 남겨졌을까. 피검사 수치는 5. 간호사는 수치가 낮아졌으니 임신이 아닌 것으로 판명났다고 설명했다. 애초에 아무 기대가 없을 때 임신이 아니었으면 좋았을텐데... 신기루처럼 사흘 만에 모든 게 사라졌다. 나는 의사에게 물었다.
"왜 이런 일이 생긴거죠? 다음에는 좀 더 조심하려고요"
그러자 의사는 내게 자궁 모형을 들이밀며 무심하게 "어디선가 착상이 실패했겠죠, 알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여기저기 책과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본 결과 나의 상황을 '화학적 유산'이라고 부른다느 사실을 알게 됐다. 정자와 난자는 만났지만 자궁 어디에선가 금방 헤어졌다. 흔히 착상이 약하게 됐다고 말하는데 정자와 난자가 결합해 자궁 내벽에 붙었다 떨어지는 셈이다. 어떤 일로 이런 일이 생겼는지는 아무도 명확히 모른다. 의학의 힘으로 암도 조기에 잡아내는 세상인데 말이다.
결국 나는 나를 자책했다. 내가 너무 급했어, 너무 일희일비했어,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냥 생리라고 생각했을거야 하며 나를 나무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