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또다시..
어제는 종일 비가 내렸다. 우산을 쓰고 걷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러워 외출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죽인다. 그럴 때면 더딘 흐름에 지쳐가기도 한다. 창밖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무심히 바라보다가 문득 또 그리움이 찾아온다. 결코 반갑지 않은 감정. 잠시 반추하다가 멈추면 좋지만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고 허우적거린다.
궁상 맞고 어리석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끔씩 반복되는 그 감정. 회한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25년 동안 그림자처럼 함께 한다. 왜 용기가 없었을까? 모든 것을 놓아버린 채 왜 그토록 방황하며 지냈던가? 끊임없이 현실에서 도피만 하던 그때, 왜 조금 더 부딪혀 보지 못했을까? 그런 의미 없는 질문들은 여전히 날 괴롭힌다.
오랜 시간 지우려 애를 썼지만 결국에는 끝까지 남아 있는 이름. 망각의 힘을 빌려 잊힐 수 있기를 수없이 바랐었지만 그럴수록 더 깊게 각인되던 이름. 잊어버림을 잊었다. 간직해야 한다면 앞으로도 품을 것이다. 어차피 평생 후회하며, 자책하며 살아야 한다면 또 그럴 것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또 그리움이 찾아온다면 아파하며 그리워할 테다. 결국 지울 수 없음을 이제는 알기에.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잠시 스쳐 지나갈 수 있기를 얼마나 바랐었던가? 모자를 눌러 쓴 여인의 뒷모습을 볼 때면 또 얼마나 긴장했던가. 짧지 않은 시간 서울 시내 곳곳을 누비며 다녔었지만 그 행운은 늘 날 비켜가기만 했었다. 만나지 않아도 상관없을 사람들은 그토록 자주 인사를 건넬 수 있었음에도, 왜 그녀는 단 한 번도 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일까.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운명이었던 그 사람은.
포기했었던 그 우연을 다시 간직하련다. 한정된 동선의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이지만 다시 조금씩 넓혀가며 걸어가련다. 고개 숙이고 땅만 바라보던 시선도 다시 들어 올려 주변을 살피련다. 희미해져 버린, 그저 아련한 느낌만 남아 있는 얼굴일지라도 분명 알아볼 수 있으리라. 평생 마주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바람을 버리지 않으리라. 단 한 번, 인사만 건넬 수 있다면 그것으로 감사할 테니.
분명 운명처럼 느껴졌던 사람이라면 다시 마주칠 수 있을 테다. 다시 한번 두 눈에, 가슴에 깊게 새긴 후 다음 생을 기다릴 테다. 새로운 인연은 바라지 않는다. 그리움과 새로운 사랑의 무게를 가늠하며 힘겨운 줄다리기를 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상대방에 대한 예의도 아니기에 혼자라는 이 허전함을 끝내 간직하며 살아가련다.
답답한 현실과 지친 마음에 대한 넋두리를 하염없이 풀어내고 싶기도 하지만 참아내야 한다. 진심으로 귀 기울여 줄 누군가가 없음을 잘 알고 있지 않던가. 어차피 짊어지고 가야 할 숙명이라면 이겨내야 한다. 영원한 것은 없으며 그 끝은 언제가 반드시 찾아 오기 때문이다. 그 순간 조금이라도 덜 후회할 수 있도록 묵묵히 걸어나가야 한다.
술 한 잔에 시름을 타 마셔본들 그때뿐이지 않던가. 숙취에서 깨어나면 언제나 그 자리에 변함없이 자리하고 있던 그 감정들. 그런 식으로 지울 수는 없다. 그저 온전히 혼자의 힘으로 하나 둘 익숙해져가거나 털고 일어서야 하는 것 아니던가. 짜증 내지 말고 칭얼거리지 말라. 그럴수록 더 깊은 슬픔만 다가올 뿐이다. 그 긴 시간 유일하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사실 아니더냐.
용기를 내라. 희망을 품어라. 지금에 매몰되지 말고 다가올 그때를 기억하라. 익숙한 것들만 되풀이하며 점점 더 무기력해지기만 하는 스스로를 방치하지 말라. 시간이 한참 흐른 후, 이 순간을 또 얼마나 애타게 아쉬워하려고 이토록 주저앉아만 있는가.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마음을 이제 버리자. 스스로를 향해야 할 질책들을 괜스레 타인에게 전이하지 말라. 어차피 회피할 수 없는 진실을 외면하지 말라.
변함없이 반복되는 다짐이라 할지라도 비웃을 필요 없다. 다시, 또다시, 다짐하고 잊히면 또 다짐하며 나아가면 된다. 그러다 보면 한 발자국 정도는 앞으로 전진하지 않을 텐가. 제자리에 머문다는 것은 이미 퇴보와 같다. 늦었음은 없다. 늦어짐만 있을 뿐이다. 꿈을 버리고 열정을 잊어버린 채 그저 숨쉬기만 하는 삶은 이제 버리자. 두렵고 지칠지라도 다시 출발선에 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