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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 Sep 24. 2023

오래도록 밀린 일기

남북통일 보다 어려운 꿈

강원도에서 태어났다. 자라다 보니 엄마 아빠가  아니라 할머니와 큰아빠가 나를 키우고 있었다. 아빠는 명절에 혹은 가끔 예고도 없이 왔다 가곤 했다. 할머니의 다함없는 사랑을 받으며 나부 되지 않고 제 할 일 챙기는 아이로 크고 있었다. 다만 평소엔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큰아빠가 술 마시고 할머니를 때리고 주정을 부리는 개가 될 때는 악악 소리 지르며 달려들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는데 아빠에게 왜 나는 엄마가 없냐고 물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아빠는 함께 걷고 있던 길 끝에 멀리 보이는 산(걸어서는 못 갈 것 같은)을 가리키며 교통사고로 죽어서 저기에 묻었다고 했다. 아빠의 거짓말은 오래가지 못했다. 할머니랑 앨범을 꺼내 보고 있는데 엄마아빠 결혼식 사진을 보시더니 “저게 핏덩이 같은 널 버리고 도망갔다”라고 말씀하셨다.

죽은 게 아니라 도망을 갔다고? 자라면서 엄마가 있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구나 죽은 줄 알고 있어서 엄청 보고 싶거나 그립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나를 버리고 간 거였다고 생각하니 미워졌다. 그날 할머니가 밭에 일하러 가신 사이에 빨간색 색연필을 꼭 쥐고 앨범 속 엄마 얼굴에 힘 있게 낙서를 해놨다. 그렇게라도  해코지를 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렇게 엄마는 아니 생모는 빨갛게 지워졌다.

내가 자란 동네는 북한 방송이 들릴만큼 꽤 깊은 산골이었다. 논이나 밭에 삐라(북한 선전용 전단지)을 주워다가 파출소에 내면 학용품과 바꿔 쓰는 재미도 쏠쏠한 동네였다.

아침저녁이면 집집마다 아궁이에 불 피는 연기가 올라오고, 집에 소, 개, 닭, 염소쯤은 누구나 키우는 그런 동네. 하루에 버스가 5대 들어오는 종점이 우리 동네였다.

놀아야 할 나이에 친구들과 자연에서 뛰어놀 수 있었던 것이  내 인생 최고의 축복이고 은혜였다. 내 비록 유치원은 못 다녔지만, 대자연 유치원에서 배울 건 다 배웠다.

8살에 나는 아침에 요강을 비우고, (혼자 버스 타고) 학교 다녀오면 되지 키우는 아저씨집에서 짬밥을 얻어와서 개 밥을 주고, 상차림을 돕고 설거지도 하는 아이였다.

할머니가 한글을 모르셨기 때문에 학교 필요한 준비물이나 숙제도 혼자서 해결해야 했다. 3학년쯤 됐는데, 아빠가 어떤 아줌마를 집에 데리고 왔다. 시골에선 볼 수 없는 하얀 피부를 가진 아줌마였다. 할머니께 인사하고 내게도 밝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이제 저 아줌마한테 엄마라고 불러야 하는구나 생각했다. 일 년쯤 지나서 아빠가 나를 데리러 왔다.

도시에서 학교를 다녀야 한다나? 할머니가 기저귀 갈며 뼈를 갈아서 키워뒀더니 이제 와서 아빠 노릇 하려고 하나. 하고 기가 막혔지만 입 밖으로 한마디도 못하고 따라나섰다.

아빠가 데려왔던 그 아줌마는 자식이 셋(딸 하나, 아들 둘) 있었다. 갑자기 식구가 6명이 됐다. 큰 언니랑 나는 12살 띠동갑이었는데 언니랑 같은 방 같은 침대를 썼다. 새로운 학교 선생님 친구들 그리고 가족들 까지 적응하느냐고 할머니가 얼마큼 보고 싶은지도 느끼지 못하고 시간을 보냈다. 새엄마는 요리를 잘하고 얼마동안은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내가 5학년쯤 이였을까. 말을 걸어도 대답을 잘 안 하고  쌀쌀맞게 대했다. 몰래 내 물건을  검사하고 맘에 안 들면 조용히 버리는 이상한 사람이 새엄마였다. 아빠는 새엄마보다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고, 그때부터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다. 주름진 할머니 손, 할머니 냄새, 뭐든 좋은 것은 내게 먼저 주시던 할머니 사랑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밤마다 소리 없이 울다 잠들었다. 지금의 내가 이불속에서 울던 나를 만날 수만 있다면 안아주고 토닥이면서 소리 내서 울어도 괜찮다고 참지 말고 울라고 해주고 싶다.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 평생소원은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 더 큰 것은 바라지도 꿈 도 꾸지 않는다고.. 그땐 몰랐다. 그 소원이 남북통일 보다 어려운 일이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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