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역사

by 허용운

대학교를 입학하고 중학교 때 은사님을 찾아뵌 적이 있었다. 대화를 나누다가 선생님 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선생님께서는 요즘 귀여워하는 아이가 있다고 하시면서 한 일화를 들려주셨다.

"우리 반에 민재라는 애가 있는데 걔가 점심시간에 나한테 찾아와서 막 불평을 하는 거야. 바로 전 시간이 역사 시간이었는데 역사 선생님이 역사는 안 가르치고 계속 자기 얘기만 하다가 간대. 그래서 내가 그랬어. 한 나라의 역사도 중요하지만 한 개인의 역사도 중요하단다. 잘 들어드려. 개인의 역사가 모여서 나라의 역사가 되는 거야."

함께 간 친구들 모두 그 말을 듣고 웃었다. 그 아이가 귀여워서 웃었고 선생님의 대답이 현명해서 웃었다. 친구들은 자기네 학교 교수님들도 다 수업 안 하고 자기 얘기만 하다 간다며 공감했다.

기억에서 지워질 법한 이런 작은 일상의 순간이 왜 이렇게 선명하게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개인의 역사를 듣는 것이 내 일이 되어서 그런 것일까.

나는 진료를 하면서 사람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고, 왜 그런 얼굴, 몸, 성격,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이해하기 위해 듣는다. 그런데 듣다 보면 정말 그들의 몸이 하나의 역사책이나 소설책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게 된다. 동네 골목골목마다 사연이 숨겨져 있듯이 몸 곳곳에도 사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골목에 들어가 숨겨진 이야기를 알아내고 골목을 정비하는 것이 내 일이다.





70세의 여성 분이 나에게 오셨다. 내 눈을 보지 않고 등져 누워 계셨다. 얼굴 여기저기엔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얼굴이 왜 그렇게 됐는지 조심스럽게 여쭤보았다. 그녀는 나를 보지 않은 채로 25분 동안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했다.

요약해보자면, 그녀는 어렸을 때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결혼을 잘못 해서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며 살았다. 결국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자립하려고 했으나 온실 속 화초처럼 곱게 자랐기에 세상 물정을 너무 몰랐다. 하는 사업마다 망하고 사기를 당했다. 배신을 당한 충격이 너무 커서 길거리에서 쓰러졌고 그때 얼굴을 다쳤다. 그때부터 자기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워서 집 밖에 잘 나오지 않았다.

그날은 그녀가 10일 만에 집 밖에 나온 날이었다. 10일 동안 집에서 자책만 하다가 죽기로 결심했다. 목을 매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자신에게 기회를 주기로 하고 집 밖에 나온 것이다. 그렇게 25분 동안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토로하더니 마지막에는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고맙다고 했다. 아무한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여기서 하니 가슴 답답했던 것이 풀리고 속이 다 시원하다고 했다. "얼굴이 왜 그렇게 되셨어요? 음. 음. 그랬구나. 음. 음. 충격이 컸네요. 어휴." 25분 동안 내가 한 말은 이것이 다였다. 사실 이 상황이 웃기기도 했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했을 뿐이고 나는 그냥 옆에 있었을 뿐이었다.




개인의 역사는 개인이 속한 사회와 국가의 역사를 반영한다. 개인의 역사를 들으면서 내가 주목하게 된 것은 개인의 역사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회의 역사이다. 안전한 공동체는 점차 사라지고 개인만을 중시하는 이 사회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여유나 공간이 별로 없다. 그러한 사회 안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의 역사는 무시당하게 되고 개인은 관계에서 소외된다.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힘들어진다. 위와 같은 사례들이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결국 행복은 좋은 관계에서 시작되고, 관계의 만족은 '잘 말하고 잘 듣기'에서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듣기는 어렵다. 함께 있다는 느낌, 공감하는 느낌을 상대에게 주는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화 내내 공감하는 마음으로 듣는 것은 굉장히 불편하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유지하면서 들으면 말하는 상대는 그 대화가 정말 유익했다고 느낀다. 반면 이런 마음을 먹지 않고 들으면 상대는 그 대화에서 헛헛함을 느끼고 점점 입을 닫게 된다. 대화의 만족도는 주고받은 단어 수에 비례하지 않는다.

누군가와 질 좋은 대화를 하고 싶다면 대화하기 전에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면 어떨까.
'난 너에 대해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아. 그냥 곁에서 네가 느꼈던 것을 같이 느껴볼게. 나한테 말해도 괜찮아.'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잠깐의 시간을 살고 있지만, 그 짧은 시간은 당신만의 인생이 아니다. 그 시간은 같은 시간을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삶들이 압축된 것이며 (...) 당신은 역사의 표현이다.
로버트 펜 워런 <이만큼의 세상, 그리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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