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휴아빠 장꾸아들 따뜻엄마의 발리 한달살기] Day 23, 251007
아내에게 마저 험한 것이 왔다. 발리 밸리와 두드러기가 동시에. 전날부터 아내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아침부터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다. 배가 아프다며 몸을 웅크렸다. 내가 겪었던 같은 아픔이었다. 마음이 더 아팠다. 내가 먹다 남은 처방약을 건넸다. 이미 알고 있는 고통이기에, 더 이상 그 고통이 길지 않기를 바랐다.
아내의 몸은 곳곳이 붉었다. 두드러기가 심했다. 연고를 온몸에 도포했다. 간지러움을 참는 것은 얼마나 힘들 일인가. 수영장의 소독약 때문인가, 맞지 않는 음식인가, 아니면 여행의 피로인가.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빨리 회복되는 것만 중요했다. 우리는 별다른 일정 없이 회복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엄마는 아프지만 아들이 심심했다. 호텔방 안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부자 둘이서 데이트를 나섰다. 목적지는 우붓 왕궁. 걸어서 충분히 닿을 거리였다. 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궁이다. 지금도 왕족의 후손이 살고 있다고 했다. 관광객에게는 일부 구역만 공개돼 있었다.
아들은 좋아하는 장난감 칼을 들고 출발했다. 산책은 곧 모험이 됐다. 가상의 적과 벌이는 격렬한 전투가 시작됐다. 궁의 석상들은 때론 같은 편이 되고 때론 적이 됐다. 아이의 상상력이 공간을 지배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따라 함께 뛰어다녔다. 눈여겨보지 않았던 조각들을 자세히 봤다. 숨은 공간을 찾아냈다. 왕궁은 우리 둘만의 놀이터가 됐다.
성스러운 전투를 마친 후 우리는 카페로 향했다. 왕궁에서 걸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사라스와띠 사원이 정면으로 보이는 카페였다. 아이스크림 타임. 아들이 손에 쥔 숟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흙빛 건물과 연잎의 초록이 보라색 천으로 장식된 사원의 풍경이 창문 너머로 펼쳐졌다. 보라색 사룽을 걸친 관광객들이 거기서 거기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는 입장료를 내고 사원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원한 에어컨 아래에서 창밖의 수상 사원을 즐기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우붓 아트마켓에 들렀다. 예쁜 사룽이 눈에 띄자 아들이 멈췄다. 엄마가 사고 싶어 했던 옷.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엄마와 함께 와서 고르자고 구입을 말렸다. 대신 사진을 찍어 엄마에게 보여주기로 했다. 물건을 사지는 않았지만 기념품 쇼핑의 기본 정보를 충분히 모았다. 귀국이 멀지 않았으니까.
우붓은 세계적인 관광지였다. 조금만 걸어도 필요한 것을 모두 찾을 수 있었다. 발리 현지식부터 전 세계 모든 스타일의 식당까지. 특히 발리는 채식의 천국이었다. 전통에서 현대에 이르는 옷가게, 아트샵, 여행에 지친 관광객을 위한 휴식 서비스까지. 좁지 않은 공간에 이 모든 것이 응축돼 있었다.
무엇보다 편했던 것은 영어였다. 발리에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본적인 영어를 했다. 내 서툰 영어로도 충분히 소통이 됐다. 수다쟁이 택시기사도 많았다. 새삼 깨달았다. 관광 자원도 중요하고 인프라도 필요하지만, 결국은 소프트웨어가 관광 도시를 만든다는 것을.
호텔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부산이 떠올랐다. 박형준 부산시장이 영어를 제2공용어로 하자는 공약을 냈었다. 시민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적극적인 반대도 많았다. 엑스포 유치전의 일환이었던 그 공약은 119 대 29라는 참담한 유치 실패와 함께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하는 것에 나도 반대한다. 부산의 관광객은 대만,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에 집중돼 있기도 하다. 발리에 와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세계적인 관광도시를 꿈꾸는 부산에는 영어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게 된 것이다.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매장 종업원이 몇 퍼센트일까. 타고난 이야기꾼 부산의 택시기사들이 영어로 편하게 지역을 소개할 수 있다면 어떨까. 그것만으로 여행의 재미가 얼마나 더해질까.
호텔로 돌아오니 아내의 표정이 많이 풀려 있었다. 좋아졌다며 우리를 안심시켰다. 다음날 아내가 가장 기대하던 쿠킹클래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이 되면 컨디션을 봐서 참가 여부를 판단하기로 했다.
한식당을 찾아 익숙한 음식으로 속을 채웠다. 따뜻한 국물로 회복을 바랐다. 세 명 모두 다음날 아침 든든하고 건강하게 일어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