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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체 Jan 25. 2022

사촌동생의 성폭력

오늘은 상담소에서 울어 버렸다. 상담소에서 일한 지 16개월 차. 이게 무슨 일이람. 기억이 강제로 끌려 나왔다.


사촌동생의 성폭력이 있었다. 이것도 성폭력인가? 초등학생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4, 5, 6학년 즈음이었고 남자인 사촌동생은 나보다 한 살 어렸다.


명절 때 외할머니댁에 모이면 이 방, 저 방에 나눠 앉아 쉬고 놀고 그랬다. 내가 티비를 보고 있으면 슬쩍 옆에 누워 손을 옷 속에 넣었다. 그리고 배를 만졌다. 가슴을 만지면 하지 말라고 말하거나 엄마한테 말할 수 있을 텐데 배를 만지니 좀 헷갈렸다. 도망갈 곳도 없었고 도망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몇 년 동안 이어졌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했다. 잊고 지냈다. 다 커버린 사촌동생을 따로 만나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은 적도 있다. 그건 지나간 일이고 사실 겨우 내 똥배를 만진 거니까 별 일도 아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또 잊고 지냈다.


그랬던 일이 안산 들락날락 책방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하다가 기억났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책모임 멤버들에게 털어놓기도 했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 해결할 방법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엄마 아빠한테 말을 해? 그럼 뭐가 달라질까? 당사자인 사촌동생에게 말을 할까? 사과를 받을까?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에 사촌동생은 결혼도 하고 아이를 낳았다.


나는 사촌동생이 만약 딸을 낳으면 자기 딸도 만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딸이 아니길 바랐다.딸이라면 나는 움직여야   같았다. 아들이라면 안심할  있을까? 아들이라면  집엔 다행이겠지만 그뿐. 여전히 내겐 숙제로 남아있으니 달라질  없었다. 결국 태어난 아이가 딸인지 아들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자신이 없었다. 말을 해서 내가 얻고 싶은 게 뭘까? "거 봐. 엄마 아빠는 나한테 관심 없잖아."라는 확신? 평생 나랑 사촌동생들을 비교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에게 복수하기? 복수가 될까? 사촌동생이랑 다른 친척들 사이를 훼방 놓기?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전혀 모르겠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외할머니댁에 발길을 끊었다. 부모님에게도 마음이 복잡하지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에 대한 마음도 못지않다. 외할머니는 내가 계집애 주제에 쓸데없이 공부만 많이 해서 엄마를 힘들게 하는 불효녀라고 했다. 외할아버지는 세월호 사건을 비난하고 세월호 활동을 하던 나를 비난했다. 어버이연합류의 메시지는 내게 계속 보내오며 나를 괴롭게 했다. 성차별은 보너스.


나는 이제 엄마 아빠와 동생들, 사촌동생들, 친척들을 만나지 않는다. 그래도 이 사건은 그냥 지나갈 수 없을 것 같아. 이번 설 전에 엄마 아빠와 동생들에게 일단 사건에 대해 말하려 한다. 만나긴 싫고 카톡으로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아. 이번에 말하지 않으면 난 또 언제 갑자기 상담소에서 울게 될지도 몰라.


내 사건도 해결하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게 어불성설이다. '꼭 해결해야지' 류의 결심이라기보다는 '언젠가 해결을 시작은 해야지, 그렇다면 그건 빠를수록 좋지' 류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랄까. 더 이상은 미룰 수가 없는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내가 원하는 방향이 뭔지 모르겠지만 혼자서 갖고 있을 수 없을 만큼 찰랑거리던 마음이 이제는 넘쳐서 줄줄줄 흐르고 있다. 마치 내 마음에서 피가 나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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