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3주 만에 정신과 진료가 있는 날이다. 아침식사를 대충 챙기고 다부지게 헬멧을 쓴다. 30대 중반이지만 헬멧을 쓰면 나도 어딘가 한 구석은 귀여워 보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헬멧을 고정하는 턱끈이 잘 조여졌나 다시 한번 줄을 팽팽 끌어당겨서 확인하고는 킥보드에 올라타 미끄러지듯 안갯속으로 돌파한다.
오늘도 반듯한 의사 선생님을 보며 나는 왜 반듯하지 않은 사람이 됐는지 잠깐 생각한다. 요즘 잘 지냈냐는 의사 선생님의 질문에 가끔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 같다고 대답한다. OFF를 어떻게 챙기고 있는지 되물어보신다.
나한테 OFF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나는 생각을 멈추질 못한다. 의사 선생님은 생각을 잠시 끄고 휴식하는 시간을 OFF라고 부른다. OFF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밤에 잠에 들지 못하거나, 아침에 깨어나질 못한다. 잠을 자지 않는 낮 시간에도 집중이 안 되고 두통이 생긴다. 컴퓨터가 꺼지지 않고 계속 돌아가는 거랑 비슷한 것 같아. 컴퓨터는 무리해도 괜찮지만 나는 사람이라 안 괜찮다.
OFF를 챙기는 방법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나한테 가장 도움이 되는 건 바깥 산책이다. 다른 공기를 마시고, 나뭇잎이나 꽃을 괜히 자세히 살펴보는 것, 계절이 바뀌었구나 느끼면서 먼 곳을 지긋이 바라보는 게 내 OFF 방법이다. 의사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는 눈을 감고 라디오를 들었는데 그건 제대로 OFF가 아니라 컴퓨터 절전모드 마냥 애매한 것이라고 당분간은 그 방법보다 바깥 산책을 해보자고 하셨다.
혼자 하는 산책은 어색하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낯선 곳이라 그런지 조금 무섭기까지 하다. 최근 흉기난동이 연일 보도되고 난 뒤로 무서운 마음이 조금 더 커졌다. 목적지 없이 방황하는 산책은 좀 어려우니까 포기하더라도 목적지를 정하고 거기까지만 걸어서 이동해 보는 건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종류의 OFF이다. 어디로 가볼까?
도서관에 왔다. 보던 책을 반납하고 새로운 책을 뽑아 들었다. 요즘은 강의 준비를 고민하고 있다. 실제로 강의준비를 위해 뭔가 하고 있진 않다. 아무도 주지 않는 죄책감을 계속 느끼고 있는 정도이다. 일을 미루고 죄책감만 느끼는 시간을 갖는 건 내 평생의 습관이다. 오늘은 집에 있는 작업실이 아니라 무려 외부에서, 무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앉아서 작업을 해보겠다니, 호기로운 결정이다. 드디어 조금 실행에 옮긴 나를 칭찬하며 강의에 필요한 책을 서고에서 꺼내어 훑어보다 보니 어느덧 여섯 권이 되었다.
이 책들은 모두 비슷하다. 나는 이 책에 적혀 있는 내용의 대부분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나라고 해서 책을 못 낼 이유가 있나? 만약 내가 책을 쓴다면 어떤 책이면 좋을까? 그래도 기존에 나와있는 책과는 조금 다른, 나름대로 특별한 책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누구나 그렇겠지. 책을 쓴다면 특별한 책을 쓰고 싶겠지.
쌓아 놓은 책을 보면서 이래 저래 머리를 굴리다가 요즘 내가 본 적 없는 책이 떠올랐다. 그런 책이라면 내가 쓸 수 있고, 책이 출간되었을 때 잘 팔리지 않을까? 책을 쓰게 된다면 그냥 글을 쓰는 것과는 다른 뭔가가 펼쳐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출판사와 함께 책을 쓴다면 어떨까? 출판사의 편집자가 내 책을 쓰는 과정을 기다려준다면 어떨까? 난 무조건 책을 써낼 것 같다. 혼자서는 완결까지 글을 못 써내겠지만 편집자님이 있다면, 존재하시기만 한다면, 내 글을 기다려주시기만 한다면 나는 무조건 책을 써낼 것 같다. 여기까지 생각이 들자 망설일 필요가 없어졌다. 사람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생각했던 얘기를 쓰자. 쓰는 걸로 끝이 아니라 묶어 내자. 어려울까?
최근 배작가라는 분께서 출간기획서(?)를 써서 출판사 여러 곳에 보내고 4곳에서 러브콜(?)을 받았다고 올려두신 인스타스토리와 브런치글을 읽었다. 그래서 나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
인터넷에 "출판기획서"를 검색해 봤다. 간단한 양식이 몇 개 나온다. 그걸 보고 출판기획서를 쓴다. 사실 방금까지 출판기획서를 썼는데 초안은 완성했다. 내일은 원고를 좀 써봐야 할 것 같다. 원고 3개 정도와 출간기획서가 완성되면 출판사에 넣어봐야겠다. 아마 12월 초가 되려나?
누구나 그렇겠지만 혼자서 뭔가 한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나 같은 E 성향은 더 그렇지 않을까? 내 글을 기다려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너무 힘이 난다. 애인, 친구들 뿐만 아니라 내 책을 책으로 엮어내 줄 편집자님이 기다려주신다면 더욱 힘이 나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 아마추어지만 편집자님은 프로니까.. 너무 막연하고 과도하게 기대하는 것 같긴 하다. 존재만으로도 감사할 것 같아.
언젠가 내가 나만의 책을 낸다면 초고를 재빨리 쓰고 수정을 10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첫 글은 항상 엉망이니까. 2회 차부터 5회 차까지는 아마 글을 뼈대까지 갈아엎는 수정이 필요할 것이고 그 이후가 되어서야 구성변화나 미세한 표현에 신경 쓸 수 있겠지 싶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난 두 번의 출간 경험에서 10번 수정은 못 했다. 내가 겪은 직장 내 성희롱 피해를 다루는 원고였기 때문에 괴로워서 그랬을 거라고 대충 믿고 있다. 이번에는 괴로운 얘기를 쓰진 않을 테니까 할 수 있을 거야! 과연 나의 출간기획서는 출판사로 송고될 수 있을 것인가? 굉장히 기대된다.
출간준비 이외에 지난 2주 동안 다양한 시도를 했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시도는 트위치에서 라이브 방송을 해보 것이다. 유튜브는 제작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만들다 보면 금방 의욕이 시들시들해지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시작한 방송인데 친구와 애인이 들어와 주지 않으면 몇 시간이고 아무도 들어오지 않더라.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얘기를 한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았다. 반대로 누군가 내 방송에 들어와 줘도 문제가 있었다. 나만의 콘텐츠랄게 없어서 네이버 지식인에 답글 다는 걸 콘텐츠로 했는데 답글을 달면서 계속 말을 한다는 게 굉장히 어려웠다.
대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계속 방송을 해볼 예정이다. 프로 방송인들 인터뷰를 보면 처음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더라. 나도 그런 것뿐이다. 성공과 실패는 도전을 지속하느냐 포기하느냐에 달린 것 같다. 성공할 때까지 시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떤 방법이 필요할까? 계속해봐야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주에는 방송을 켜지 않고, 유튜브 영상을 만들 예정이다. 이쪽 도전이 힘들면 저쪽으로 도망치는 게 내 방식이다. 이렇게 살아도 될까 싶지만 정면돌파는 너무 어렵다. 이쪽 해보고 힘들면 저쪽으로 도망치고, 누군가는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고 말했지만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열심히 하지 말고 되는 거 하라고 했다. 오늘도 나는 되는 걸 찾아서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아자아자. 힘 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