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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체 Nov 16. 2023

아직도 엄마 목소리가 들려

오늘도 애인이 먼저 깨어나 출근준비를 한다. 바스락거리던 애인이 다가와 내 이마에 입을 맞춘다.


"보라씨~ 나 잘 다녀올게요~"


아, 벌써 8시구나. 눈도 안 떠지지만 힘껏 양팔을 벌려 머리 위로 커다란 하트를 그린다. 이렇게라도 해야 비록 내 몸은 이불에 누워있지만 너의 출근을 응원하는 내 마음은 진짜라는 걸 조금은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생각해 낸 방법이다. 애인 보기에 이불에 누워 머리 위로 하트를 그리는 나는 어떤 모습일까? 좀 웃길까?


달라붙은 입술을 겨우 조금 떼면서 웅얼웅얼 잘 다녀오라고, 사랑한다고 말해본다. 벌써 현관으로 걸어가고 있는 애인에게 들릴지 안 들릴지 잘 모르겠다. 인사를 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면서 다시 이불속으로 파고들다가 문득 한쪽 눈을 찔끔 열어 창문을 쳐다본다. 어라? 원래 이 타이밍에 엄청 눈이 부셔야 하는데?


오늘 아침은 이상하게 어둡다. 아직 눈앞이 뿌옇고 잘 보이진 않지만 해가 떠 있어야 하늘좌표가 텅 비어 있다는 건 알겠다. 잘 안 보이지만 아마 하늘도 회색빛일 것 같다.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 비가 오는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늦잠 자기 좋은 날이 아닌가? 그래, 이건 기회야!


마음속으로 오예스를 외치는 찰나에 휴대폰 알람이 시끄럽게 울린다. 하필 오늘이다. 심리상담을 아침에 가기로 약속한 날이 하필 오늘이야. 하!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른 아침에 심리상담을 잡았을까? 온 마음을 다해 힘껏 후회해 본다. 후회라도 후회 없이 하겠다며 발악해 보지만 역시 부질없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약서랍장 앞에 앉아 [아침]이라고 적힌 약봉지를 찢어 약 두 알을 꺼낸다.


"밥 먹고 먹어! 빈 속에 약 먹으면 안 돼!"


갑자기 들려오는 엄마 목소리. 하지만 엄마는 여기 없다. 몇 년 전, 나는 엄마랑 이별했다.


"이제 나한테 연락하지 말아 줘. 그동안 나 많이 힘들었어. 이제 엄마 아빠를 보고 싶지 않아. 잘 살아."


아직도 엄마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내 일상에 찾아온다. 눈을 질끈 감고 엄마는 여기 없다고, 이 약은 빈 속에 먹어도 되는 약이라고 생각해 본다. 의사 선생님이 빈 속에 먹어도 된댔어. 약사님한테도 확인했지. 빈 속에 먹어도 괜찮아.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 눈을 부릅뜨고 약을 털어 넣는다. 어차피 지금 바로 시리얼에 우유를 부어 우걱우걱 씹어먹을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시리얼을 먼저 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모든 ADHD가 다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약을 먹어야 일상생활이 가능해진다. 1분 1초라도 더 빨리 멀쩡한 정신이 되고 싶어서 아침에 눈 뜨자마자 약을 먹는다. 이런 생활도 벌써 11개월째. 약은 좋지만 약 먹을 때마다 들어야 하는 엄마 목소리가 고역이다. 언제쯤 없어지려나.


그래도 뿌듯한 건, 단 하루도 엄마 목소리에 져본 적 없다는 것이다. 약 자체를 까먹어버려서 못 먹는 날은 있어도 엄마 목소리에 밀려서 약 복용을 미룬 적은 없다. 아무도 모르는 나 혼자만의 싸움이라 조금 웃기고 이런 일에 뿌듯해하는 내 모습이 슬프다.


대충 씻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거울을 보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이다. 이런.


"옷이 그게 뭐니? 네가 그렇게 어두운 옷만 입으니까 우울증이네 뭐네 그러는 거 아니야? 밝은 걸로 당장 갈아 입어! 저승사자도 아니고 그게 뭐야, 진짜! 어서!"


또 시작이다. 그래,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봐. 내가 무슨 옷을 입건 말건 그건 이제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엄마가 뭔데? 오늘은 아침부터 지독하다.


내가 어쩌자고 검정옷만 골라 입었을까. 날씬해 보이고 싶은 날인가? 처음 검은색 옷을 입은 건 날씬해 보이고 싶어서였고, 스무 살이 넘으니까 섹시해 보여서 좋았다. 엄마는 내가 검정옷을 입는 걸 싫어했다.


우울증 때문에 정신과 다닌 다는 얘기를 꺼낸 게 잘못이었을까? 엄마는 내가 나약해서 우울증이란 쑈를 하는 거랬다. 노력하면 될 텐데 노력하기 싫어서 우울증이라는 병명을 가져온 게 아니냐고, 그깟게 무슨 병씩이나 된다고 유난이냐고, 다들 그러고들 산다며.


그래, 내 잘못이다. 내가 자해를 했어야 했는데. 자살을 시도했어야 엄마도 심각성을 알 수 있었을 텐데! 내 잘못이다. 자해도 안 하고 자살시도도 안 한 내 잘못.


"그 옷은 동생 거 아니니? 너 그거 동생한테 허락받았어? 걔가 너 입어도 된대? 옷 늘어나는 거 아니야? 그 옷은 늘어나도 되는 옷이니?"


어쩌자고 동생의 코트를 꺼내 입었을까. 아니, 이 코트는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야? 요즘 상담에서 동생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동생의 옷을 꺼냈나? 생각해 보니 좁디좁은 원룸으로 몇 번씩이나 이사를 다니면서도 이 코트는 계속 갖고 있었다는 거잖아? 내가 왜 그랬을까? 오늘은 알 수 없는 일 투성이다.


다행히도 출발할 시간이다. 혼란스러워할 시간도, 옷을 다시 갈아입을 시간 따위도 없다. 다행이다. 그래도 거울로 보는 나는 예쁘다. 예전보다 덩치가 더 커졌고, 얼굴도 더 커졌지만 그래도 예쁘다. 그래, 오늘은 가을 여자 느낌이다.


거울을 보는 나를 엄마가 본다. 예쁘게 다 큰 딸을 보는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그리고 내 뒤통수에 말을 꽂는다.


"넌 네가 예쁘니? 얼굴도 크고, 덩치도 큰데?"


진짜 엄마 목소리가 제발 좀 그만 튀어나오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가방만 고르면 된다. 짧은 외출이니까 작은 가방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다.


"또 작은 가방을 사 왔네. 덩치도 큰 게 가방은 왜 저렇게 작은 걸 맨대. 그 가방 메면 덩치가 더 커 보여요~ 아니? 모르니?"


어렸을 때부터 나는 귀엽고 예쁜 작은 가방을 좋아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내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큰 가방만 메고 다니라고 말했다. 오늘도 난 지지 않는다. 초록색 작은 가방을 열어 소지품을 챙긴다. 안경, 이어폰, 휴대폰 배터리... 그래. 오늘도 지지 않았어. 결국에는 입고 싶은 옷에 메고 싶은 가방을 메었다. 그럼 됐지.


이런 게 엄마 목소리라는 건 얼마 전에 알게 됐다. 아마도 엄마랑 헤어진 후. 당시에 나를 상담해 주던 선생님 덕분에 엄마 목소리를 분리할 수 있었다.


"보라씨, 지금 그건 누구의 목소리죠?"


분리하기 전에는 저 말들을 내 목소리로 들었다. "너 뚱뚱해." "너 게을러." 내가 나한테 힐난하는 것 같았다. 심할 때는 내가 분열된 것 같았다. 왜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마음 편하게 선택할 수 없는 걸까. 이유도 계기도 알 수 없어서 괴로웠다.


그 목소리들이 내 목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깊숙이 안도했다. 내가 분열된 건 아니었구나.


이렇게 한 발씩 과거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것 같다. 너무 느려서 영원히 못 빠져나오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긴 한다. 내 속도는 달팽이나 거북이보다도 느린 것 같고, 더 빨라질 것 같지도 않다. 나는 대체 언제쯤 현재를, 내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될까.


요즘 상담해 주시는 선생님께서 칭찬일기를 권해주셨다. 칭찬일기가 지금 내 모습을 인정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하루에 두 개 스스로를 칭찬하는 것도 겨우 해낸다. 심지어 그 두 개 조차 며칠에 한 번 날을 잡아 몰아서 쓴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계속 써 보려고 한다. 그러기로 마음먹었다.


나도 곧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 될 거라고 조금 기대해 본다. 많이 기대하면 실망하게 될까 봐 아직은 두렵다. 지금은 변화의 시기일 뿐이야. 나를 안아주자. 아니면 애인한테 안아달라고 하자. 그러면 돼. 이제 엄마는 없다. 이건 겨우 엄마의 목소리일 뿐이다.


오늘 실시간 도전기는 쉬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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