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연 Feb 23. 2020

(6) "둘러보고 오라"는 말에 둘러만 보고 왔더니

한창 조국을 구속하니, 수호하니 말이 많았던 무렵. 그러니까 서초동이 두 갈래로 찢어지기 시작했을 때 편집장이 대뜸 말했다. "오늘은 법원이랑 서초동 한 바퀴를 둘러보고 오시죠." 아침 발제가 별로였나? 그건 오늘만 있는 일은 아닌데. 아무튼 편집장의 주문은 이랬다. "서초동의 폭풍전야 같은, 정말 큰일이 터질 것 같은 그런 긴장감을 담아오시라."


3시간 정도를 허락받았던 것 같다. 서울중앙지법과 서울중앙지검, 대검창청 앞을 돌아다녔다. 당시 내가 적은 메모는 거칠게 간추리면 대강 아래와 같다. 


법원에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윤중천 씨 재판이 진행 중이었다. 한때 이름 석 자로 세상을 들썩였지만, 잊히고 있었다. 방청석엔 기자 두 세명이 전부였다.
서울중앙지검 앞에는 기자들이 잔뜩 포진해 있었다. 혹시 소환될지 모르는 정경심 교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대검찰청 앞엔 크고 작은 꽃다발이 배달되어 있었다. 윤석열 검찰총장 앞으로 온 응원의 메시지였다. 옆에는 노인 한 분이 태극기를 휘날리고 있었다. 노인은 이날 내가 본 인물 중 가장 많은 단어를 내뿜었다. 핵심은 '사기 탄핵'이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2시간 정도를 썼다. 이때 내 심정은 조금 단순했다. '최대한 많은 걸 긁어모으면 뭐가 되든 되겠지'였다. 그래서 눈에 들어오는 대로 메모했다. 대단한 재료가 모인 것 같았다. 조금 이른 시간에 회사로 돌아갔다. 의기양양했다. 수려한 문장력을 뽐낼 일만 남았다 싶었다. 


당연히 망했다. 마감 시간이 다가올수록 피가 말랐다. 당시 스케치를 지금 다시 보니 확실하게 느껴진다. 정말 밋밋하기 짝이 없다. 독자가 위 스케치를 읽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결국 이 기사는 편집장이 엄청난 내공을 발휘한 끝에 발행될 수 있었다. 크게 방향을 틀어야 했다. 


편집장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대로 둘러보고 올 게 아니라, 늘 필요한 장면을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예시 하나를 들어줬다. 이런 장면이었다.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누군가 차에서 내린다. 기자들 수십 명이 허둥지둥 달려간다. 혹시 정경심일까 싶어서다. 그런데 정경심이 아니다. 기자들은 한숨을 쉰다. 아쉬운 소리도 한 번쯤 내뱉는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기지개도 켜고, 먼 산도 한 번 쳐다본다.


내가 적어온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다'와 비교도 안 되게 생생했다. "이런 장면이 없었습니다"라고 변명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편집장의 말이 맞았다. 필요한 장면을 머릿속에 넣어두고 다니지 않았다. 그냥 보이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다녔다. 필요한 장면이 나올 때까지 충분히 기다리지도 않았다.


매번 뒤늦은 후회만 하는 나날이다. 언제쯤 영민해질 수 있을까.

이전 05화 (5) 오래 버티고 싶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