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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May 02. 2020

(8) 처음 물 먹은 그날 이후에도 바뀌는 건 없었다

한창 'n번방' 사건의 소용돌이가 계속될 때. 경쟁 언론에 처음으로 물을 먹었다. 낙종(落種).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꼴'이라더니, 당해보니 그 이상이었다. 머리에 쟁반을 맞은 느낌이었다. 거의 다 했었는데. 핵심 취재원 통화도 내가 제일 빨랐을 텐데. 미련을 떨치지 못했지만, [단독]은 남의 지붕에 올라가 있었다.


n번방 가입자들에게 '범죄단체조직죄'를 적용할 수 있다는 기사였다. 지금에서야 법무부와 검찰 모두 "이 죄를 검토해보겠다"고 밝혔고, 결국 잘 알려지게 되었지만 기사를 준비할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최초로 "이 죄를 적용해야 한다"고 한 변호사가 있었고, 나는 (아마도) 해당 변호사와 가장 빨리 통화한 기자였다.


그러나 기껏 준비한 기사는 발행되지 못했다. 편집장은 "(기사에 필요한 최소한의) 근거가 부족해 보인다"고 했다. 조직폭력배 정도는 돼야 가능하던 범죄단체조직죄를 이번 사건에 적용한다는 건 매우 파격적인 주장이었고, 이 때문에 기사가 나가려면 그만큼 탄탄한 근거가 필요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준비하지 못했다.


퇴근한 뒤 밤을 설쳤다. 로스쿨에 다니는 친구한테까지 물어보며 '내일은 기사를 완성하겠다'고 한 마음먹은 다음날. 물을 먹었다. 나와 같은 시작점에서, 결국 취재에 성공한 기자가 있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나의 실패였다. 편집장은 "물 먹은 게 맞고, 그것도 눈 뜨고 먹은 것"이라고 정확하게 일깨워줬다.


뭐가 부족했을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만회에 나서야 했다. 같은 날 법무부가 낸 보도자료를 뒤지고, 담당자에게 전화를 돌리고, 한번 더 변호사와 연락한 끝에 기사는 그럭저럭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만회는 아니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물 먹지 않게 되었다.'는 등 값진 교훈도 없었다. 그저 쓰라렸다.


여전히  먹고, 먹이고 있다.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성급한 결말은 없다. 그냥     버둥거리고,     뻗게 되었다는  현실적이다. 그나마 조금  정확한 방향으로 몸부림칠  있길 바라면서. 그렇게 취재(取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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