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감성적이지는 않다. 좋고 싫음에 대한 감정의 폭이 좁다. 우울이나 낙담은 금세 나를 스쳐 지나간다. 감정은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나는 늘 원래의 자리를 찾아간다. 요동치는 표정이 없으니 가끔 영혼 없다는 오해를 사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기쁨으로 보내고 있다. 늘 화락하고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무엇이든 불평 없이 꾸준히 하는 거라면 자신 있다. 지치지 않고 오래 걷기 위한 덕목일지도 모르겠다.
외적이든, 내적이든 소란스러운 것을 질색한다. 시끄러운 분위기의 장소에 있으면 체력이 급격하게 빠진다. 내적으로는 파도치는 바다보다 잔잔한 호수가 좋다. 가끔 누군가 돌멩이를 던질 때도 있지만 몇 번의 파장을 견디면 돌멩이는 가라앉기 마련이다. 파장을 버티고 있다고 인식하지도 않는다. 나의 타고난 기질이 일희일비하는 대신 운수에 맡기는 데 능숙할 뿐이다. '그럴 수도 있지', '운이 안 좋았네'가 나의 일관된 태도다. 타인도 나의 통제보다는 운수에 맡기고 바라보니 화가 적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경계를 잘 안다. 그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전제 아래 나는 자유롭고 행복하다.
감성적이지 않다고 해서 이성을 신뢰하지도 않는다. 미셸 드 몽테뉴 식으로 말을 하자면 이성은 '언제나 자기 혼자서 해보겠다는 사색의 겉모습'이다. 나의 사색은 보잘것없고 부끄러울 때가 많다. 이번엔 꽤 그럴싸하다고 생각할 때도 며칠이 지나면 흔적도 없다. 나의 발은 주로 헛디디고 쓰러진다. 시야는 좁고 혼란스럽다. 글 조차 애를 쓰며 고쳐도 나아지지 않고 뭘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니 나의 이성만 믿다가는 젊은 꼰대가 될 것 같다.
이성은 상황과 환경, 관점에 따라 바뀐다. 나에게 유리할 때와 불리할 때 고집하는 게 다르다. 축구만 해도 파울이냐, 아니냐를 따질 때 대상이 내가 응원하는 팀인지, 상대팀인지에 따라 보이는 게 다르다. 우리 팀은 항상 정당한 것 같고 심판이 아니라고 해도 뭔가 억울하다. 내 눈엔 아무리 봐도 상대팀이 잘못한 것 같다. 아이들끼리 심판이 없는 축구를 하다가 서로 싸우는 건 흔한 일이다. 커서도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다. 여전히 각자의 이성을 고집하다 보니 감정도 따라서 격앙된다.
사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람은 남이 자신의 의견을 고쳐주기를 원하지 않는다. 생각을 바꾸려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상대가 위계적으로 가르치려는 억압이 아니라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면 기꺼이 응하는 게 예의다. 무조건 해치울 생각으로 발톱을 내세울 게 아니라 한 번은 들어볼 만하다. 나의 이성이 불확실함을 인정한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나의 이성은 불확실하기 때문에 틀려도 된다. 나와 반대되는 주장을 들을 때면 분노보다는 주의가 환기된다. 집중했을 때 이치에 맞아 내 의견을 굽힐 때면 기분이 묘하다. 내 주장이 통할 때보다 더 큰 즐거움을 느낀다. 몰랐던 걸 깨우쳤으니 가장 큰 이익을 얻은 사람은 주장을 통하게 한 타인이 아니라 생각이 확장된 나 자신이다. 마땅히 감사를 표하는 게 적절하다.
감성적이진 않지만 이성도 가냘프다. 감정은 내 안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이성은 불확실해서 틀릴 때가 많다. 중요한 건 나의 이성이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틀려도 된다고 스스로 받아들이는 게 필요하다. 심리검사를 하면 이성적인지 감성적인지 택해야 할 때가 많아서 곤란하다. 이성적인지, 감성적인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이럴 때와 저럴 때가 다르지만 그래도 좋다.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것보다 가치 있는 건 나를 옳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다. 오늘은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