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느린 단상

낮은 고요하고 밤은 시끄럽다

by 유연

된더위를 버티며 선선한 가을을 간절히 바랐다. 가을은 왔지만 새 학기 또한 함께 올 줄은 몰랐다. 미련하게도 대학생은 단풍과 함께 개강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을 잊었다. 계절이 바뀌길 원하면서 일상은 계속되길 원했다.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다가온 지금은 내 예상보다 빨랐다.


일주일도 남지 않은 개강을 착잡하게 기다리고 있다. 좋은 글을 많이 읽을 수 있는 과목들로 수강신청을 해뒀지만, 권태가 앞선다. 3학년 2학기구나. 배울수록 내가 뭘 모르는지만 깨닫고 있다. 지식은 조금 늘었을지 몰라도 지성과 지혜는 성장하지 않았다. 학자의 이름과 세세한 용어는 알아도 어떻게 활용할지 모르겠다. 전공에 대한 큰 그림도 그릴 수 없고 남에게 설명할 수도 없으니 걱정이다. 남의 지식만 천명하게 배우다가 끝나도 별수가 없다.


낮이 고요하다. 암막 커튼을 쳐서 낮인지도 모르겠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침대에서 부스럭거린다. 밥을 먹긴 해야 할 텐데 배고픔보다 귀찮음이 늘 한 시간을 더 버틴다. 닭가슴살을 데우고 사과와 바나나, 죽을 먹는다. 비타민까지 한 알 먹었으니 이 정도면 꽤 괜찮다. 커피를 내리는 건 이제 자신 있다. 향과 농도, 모두 내 취향대로 알맞다. 페이스북을 조금, 인스타그램을 조금, 브런치를 조금 본다. 전화나 문자, 카카오톡은 볼 게 없다. 나는 꽤 자주 타인을 관찰하지만 말을 건네지는 못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할 일이 없다. 책을 조금 읽어볼까. 적당히 놀면서 성취도 있으니 이럴 땐 책만 한 게 없다. 낚시하듯이 몇몇 문장을 에버노트에 옮긴다. 책을 읽다가 글감이 떠오르면 월척이다. 커튼을 들춰보니 바닥을 쓸었던 햇살이 보이지 않는다. 해가 짧아졌다.


밤이 시끄럽다. 낮을 늦게 시작한 만큼 밤은 길다. 헬스를 한 시간 정도 다녀온다. 반년 넘게 같은 시간, 장소에 가고 있으니 낯익은 얼굴이 많다. 각자 땀 흘리면서 열심이다. 런닝머신만 뛰는 사람, 우렁찬 기합소리를 내는 사람, 11시 35분에 씻으러 가는 사람. 서로 알고는 있음이 분명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말을 건네지 못한다.


바닥을 쓸고 닦는다. 화장실엔 락스를 뿌리고 에어컨엔 세정제를 뿌린다. 선풍기 날개는 먼지가 어찌나 빨리 끼는지 모르겠다. 손톱, 발톱은 벌써 자랐고 눈썹도 마찬가지니 생각난 김에 다듬는다. 이제 물건을 제자리에 정리하는 건 무의식적으로 한다. 집안일은 티 나지도 않고 알아봐 주는 사람도 없다. 서글프지만 그래도 집을 돌본다.


'Cigarettes After Sex'의 노래를 블루투스 스피커로 듣는다. 베이스의 울림만큼 나의 기억도 울린다. 멍해진 채로 나에게 귀를 기울이니 부끄러운 기억이 겹겹이 떠오른다. 기억은 공정하지 못하다. 상대는 떠올리지도 못하겠지만 내 얼굴은 화끈거린다. 익숙해질 때도 됐다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고 한다.


하지도 않을 거면서 괜한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본다. 인턴이나 동아리도 들렸다가 공모전도 한 번 가본다. 내가 있을 곳은 없다. 선택지는 많은데 딱히 끌리는 게 없다. 뭘 선택해도 그럭저럭 괜찮겠다는 생각뿐이다.


통장 잔액을 보면서 중고거래 사이트에 팔 만한 것들을 올려본다. 왜 샀는지 모르겠는 물건이 많다. 팔겠다고 올리면서도 자신이 없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가격을 낮추고 있다. 사겠다는 연락은 여전히 드물다. 연락이 오면 지레 겁을 먹고 가격을 먼저 낮추기도 한다.


나는 또 습관적으로 페이스북을 조금, 인스타그램을 조금, 브런치를 조금 본다. 새로운 게시물은 모두 확인해야 적성이 풀린다. 올라오는 지인의 다채로운 일상이 부럽지는 않다. 각자의 가장 반짝이는 순간을 추려냈을 테니 겉보기에도 응당 밝았으면 좋겠다.


쿵쿵 울리는 베이스 탓에 책이 읽히지 않으니 왓챠플레이에서 영화를 본다. '보고 싶어요'는 많이도 해뒀는데 정작 끝까지 본 영화는 거의 없다. 구독취소를 하자니 그래도 간간이 한 편씩 보니 끊지도 못하겠다. 뭘 말하는지 모르겠는 영화를 꾸역꾸역 한 편 본다. 전문가의 평을 본 뒤에서야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못 미덥지만 읽고 나니 그럴싸하긴 하다.


밤이 소란스럽다. 왠지 기분이 좋지 않다. 덕분에 글이라도 써지니 다행이다.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리나>에서 쓴 첫 문장이 맴돈다. 행복은 비슷하지만, 불행은 제각각이라는 뜻이다. 행복에 관해서 쓸 거리는 고만고만하지만, 불행은 나의 사소한 단면을 있는 그대로 쓰면 된다. 솔직하게 쓰기만 하면 남들과는 다른 모습일 테니 고민이 적고 편하다.


새벽 4시다. 내 집은 작은 형광등 하나에 의지하니 지금이 몇 시인지는 상관없다. 낮인지 밤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도 어쩐 일인지 나의 낮은 고요하고 밤은 시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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