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은 <안자이 미즈마루>라는 책의 부제다. '대충'이라니 허술하다는 오해를 사기 쉬운 표현이지만, 책을 읽다 보면 여유가 느껴진다. 자유로운 선과 산뜻한 색이 편안한 마음을 자아낸다. '힘 내!, 힘내야지!'라는 말로 가득 찬 세상에서, 과한 힘이 들어가지 않은 작품은 힘 빼도 된다는 위로를 건네준다.
힘 뺀 채로 살고 싶다. 우선 내가 즐거웠으면 한다. 노력이 기본이 돼버린 불확실한 시대가 됐으니, 나는 마음을 다해 대충 산다. 과정에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나의 몫이 아니라고 넘긴다. 그러다 보니 일단 열렬히 무언가를 해본 뒤, 대체로 때려치우면서 내가 원하는 인생의 방식을 찾아갔다.
3년 정도 다닌 교회를 관둔 지 4개월이다. 성인이 되고서야 교회를 다녔던 건 작은 호기심이었다. 친했던 친구가 갑작스레 세상을 떴고, 친구가 믿었던 신이 정말로 있는지 궁금했다. 종교 중에는 기독교가 제일 그럴싸해 보였다. 접근성도 좋은 데다, 성경이라는 스테디셀러는 누구나 읽을 수 있었고, 기도는 왠지 영적 성장을 도와줄 듯했다.
열심히 다녔다. 일요일마다 교회에서 온종일 있으면서 궁금했던 걸 많이 찾아갔다. 매일 읽던 성경을 통독했고, 하루의 마지막엔 기도를 했다. 일주일에 한 번만 외출이 가능했던 의무경찰이 교회에 갈 때 그걸 썼으니 열심이었다. 고민을 터놓는 끈끈한 관계도 만들었고, 존재의 본질적인 갈증을 해소해가는 듯했다.
그러나 교회를 때려치워야겠다고 깨닫는 때가 왔다. 나의 가치관과 맞지 않는 불편함이 교회에 만연했다. 나는 남성이 하늘이라면, 여성도 하늘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에서는 여성을 땅이라고 하고, 교회에서는 여성이 땅에서 잘 지내는 법을 설교한다. 신학은 이를 훌륭히 뒷밤침 한다. 화목하기 위해 참거나 복종하는 건 여성이 되고, 본성임을 강조하는 건 남성이 된다. 존 그레이가 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와 마찬가지로 문화적으로 만들어진 성차를 인정하고 강화한다.
양립할 수 없는 가치가 교회에 존재하는 듯했다. 예수는 여성을 포함한 모두를 사랑한 페미니스트라는데, 교회는 동성애를 죄악이라고 가르치며 차별금지법과 낙태죄 폐지를 반대했다. 교회는 이스라엘 시대부터 인류가 받았다는 원죄의 탓을 여성에게 돌렸다.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게 한 하와를 들어 여성의 타고난 이기심과 나약함을 강조했고 여성을 그렇게 만들려고 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니체 등 수많은 인류의 위인들은 성경 구절을 근거로 차별적 언사를 남기며 수천 년 간 이어져 온 가부장제 사회를 지속하는 데 기여했다.
케르스틴 뤼커와 우테 댄셸의 <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는 남성 중심적으로 쓰인 역사를 새롭게 해석했다. 디모데전서 2장 11~12절을 인용했는데 교회를 다닐 때 읽었던 그 구절이 나는 부끄러웠다.
여자는 전적으로 복종하며 조용히 배울 지니라. 오직 나는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다만 조용할지니라
성경을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고, 어떤 경전이든 당시의 율법을 반영한다. 다만,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데 있어서 교회가 필요한지 잘 모르겠다. 선교사분들의, 교회의 순기능은 놀라울 지경이지만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불편했다. 성경이 재해석되는 것 자체가 불변의 진리는 아닌 듯했다. 교회가 과거에 했던 일들을 기억하고, 특히 현재에 하고 있는 일들을 살펴볼수록 교회를 더 이상 다닐 수 없었다.
교회를 그만둘 때쯤은 소년부 교사를 맡고 있었다. 희미한 믿음으로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없었다. 무게감에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도 황당하고 무책임한 일이었으니 부끄럽기도 했다. 내가 택한 방법은 맞서기보다 때려치우거나, 도망치는 거였다.
사실 잘 모르겠다. 언제나 내가 틀릴 수도 있다고 가정한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실현 가능할지 조차 막막하다.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곤 있는 건지 답답할 때가 많다. 정치적 올바름과 다양성의 포용, 소수자를 존중하는 공정한 사회가 언젠가 올지, 내가 거기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을지, 혹은 교회가 언젠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인간 존엄은 추구하는 가치에 있다고 믿는다.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다. 교회와 페미니즘이 공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나는 이번에도 때려치우거나, 도망쳤다. 정답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선 남아있는 것들에 마음을 다하고 싶다. 더 이상 신에게 의지하진 않지만, 가끔은 기도를 하며 나와 대화를 나누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