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고백록

개인으로 존중받을 필요성

by 유연

내가 원하는 인생의 방식이 있다.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그리곤 하는데, 우선 한국적인 것이 싫다. 성차별과 유교, 집단주의, 회식, 참견, 혹은 나이 문화가 거북하다. 가족의 형태는 이보다 훨씬 다양해졌으면 좋겠고, 존댓말은 없는 게 나을 듯하다. 명절과 제사는 덜어내야 할 게 많아 보이고, 공적으로 만나는 사람들과는 굳이 가족처럼 지내고 싶지 않다. 건배나 생일주 같은 술 문화는 대체 누굴 위한 건지 모르겠다.


내가 즐겁게 살자면 무엇보다 사랑하는 소수가 중요하고, 그 밖에는 느슨한 연대가 필요하다. 철저히 개인으로 존중받고 싶다. 우선 경제력이 뒷밤침해줘야 할 듯하고, 대체 불가능한 나만의 능력을 키워야 할 듯하다. 그러니 되는대로 많이 읽고 쓴다. 무엇이 옳은지 질문을 던지며 성찰한다. 내가 나일 수 있기 위해선 힘겹게 나를 알아가야 하고, 또 힘겹게 그걸 유지해야 한다.


나를 비롯한 타인도 소속 집단과 상관없이 개인으로 존중받았으면 한다. 청소년과 여성, 난민, 장애인과 성 소수자의 당연한 권리가 당연해지는 데 힘쓰고 싶다. 그들을 이해할수록 존경하게 됐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나에게는 선택이 아니라 어떤 이끌림으로 다가왔다. 하면 좋고, 안 한다고 비난할 수 없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우선 사로잡혔다.


페미니즘은 남녀 갈등을 조장하는 갈등의 심화가 아니다. 이제껏 인류의 절반 이상이 겪고 있던 고통을 위한 해결책이다. 무엇보다 개인을 개인답지 못하게 하는 구조와 모순을 때려 부수는 위대한 일이다. 결국, 억압받는 여성이 해방되면, 억압하느라 가부장의 탈을 쓰고 있는 남성도 해방될 것이라 믿는다. 물론 중립인 척, 가해의 위치에 있는 남성보다는 피해를 받는 여성의 입장에 지극히 많은 관심이 간다.


여전히 폐쇄적인 집단 안에서 존재한 채, 울타리 밖의 사람들을 비난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명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막연히 남들이 하니까 문제의식조차 느끼지 못한 채 따라 하는 건 아닐까. 그러지 않으면 자신의 현재 삶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겁을 먹기 때문은 아닐까. 이들이 힘겨운 성찰을 통해 스스로가 되었으면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사회는 타인의 슬픔을 모르는 공동체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집단은 필연으로 권력을 가지고, 권력은 공기처럼 작동한다. 권력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회적 비용이 들어갔는지는 누구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비장애인은 그들만의 집단 안에 머물 때 권력을 인식하지 못한다. 밖을 나설 때 아무런 제약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남성도 마찬가지다. 밤거리를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고, 화장실이나 택시를 걱정 없이 이용할 때 그들은 그게 권력임을 인식하지 못한다.


여성이 일상적으로 겪는 불안과 공포, 분노는 구조적 맥락에 의해 형성된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라는 말은 여성 경험의 사회문제화를 주장하는 표어다. 사적인 영역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의 영역이란 뜻이다. 해당 표어가 1960년대 여성학의 주요 의제가 된 결과 생리와 강간, 성폭력, 임신, 낙태와 가정 폭력, 데이트 폭력의 문제가 공론장으로 나왔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결국 모두가 일상에서 개인으로, 개인답게 존중받을 필요성이 중요하다. 타인의 시선, 발화, 혹은 신체적 접촉으로 위축받는 개인이 있다면 그건 미화할 수 없는, 해서는 안 되는 폭력이다. 예민한 게 옳다. 가해자를 탓해야 하고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일반적인 삶 속에서, 사적 영역에서 모든 개인의 권리가 실현되는 것이야말로 모든 걸 초월한다. 다른 가치와 저울질하며 비교하거나, 낙인을 찍거나, 편을 가르거나 할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난 되는대로 글을 읽고 쓴다. 매번 무섭고 힘겹지만, 할 수 있는 일을 그럭저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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