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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오 Dec 23. 2021

참치미역국

청지사 레오의 글쓰기 16

딸아이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했다. "아빠! 아빠가 학교 다닐 때 제일 높았던 아파트는 몇 층이었어?" 나는 이 질문에 어릴 적 우리 동네 아파트를 생각하게 됐다.


내가 살던 곳 주변은 거의 대부분 다세대주택들이었다. 내가 살던 집도 3층 높이의 빌라였고 친구네 집들도 모두 비슷했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우뚝 솟은 아파트는 6학년 때 우리 반 반장 네 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반장에게 생일 초대를 받고 딱 한 번 놀러 갔었는데 반장이 살던 15층 아파트가 그 나이에 목이 아플 정도로 높아 보였다. 지금은 30~40층 높이의 아파트가 흔해졌지만 그 당시 내게는 그 아파트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집처럼 보였다. 뭔가 특별해 보였다.


딸아이의 질문에 옛날 생각을 하며 답변을 해주고 나니 그 생각은 꼬리를 물어 그 시대 아빠의 학창 시절 이야기로 이어졌다. 100원어치 떡볶이를 먹었던 이야기, PC방이 아니라 오락실을 다녔던 이야기, 그 오락실에서 실내화 주머니를 놓고 와서 엄마에게 혼났던 이야기 등등등.


아이들은 아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좋아한다. 아빠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지금과 다른 시절이 신기한가 보다. 초등학교(사실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했다)부터 시작된 이야기의 배경은 소재 고갈로(또는 희미한 기억으로) 대학까지 이어졌다. 그러다 등장한 단어가 바로 <참치 미역국>이다.


참치 미역국은 내게 추억이 가득 담긴 음식이다. 배고프고 힘들었던 대학생 시절, 난 친구 몇몇이 함께 모여 자취생활을 했다. 저렴한 학교 식당도 있었고 학교 앞에 음식점이 꽤 있었지만 보통은 집에서 밥을 해 먹었다. 나와 친구들의 요리 솜씨가 대단히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가서 사 먹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이다는 이유 때문이다.


여럿이 함께 지내는 남자 형제들이 나름의 뭔가를 해보겠다며 용돈을 걷어 생활비를 충당하고 당번으로 역할을 정했다. A가 청소를 하면 B는 빨래를 하고 C는 요리를 하는 식이었다. 이 당번제는 로테이션으로 돌아가곤 했는데 청소와 빨래가 아닌 요리를 담당하는 날에는 며칠 전부터 어떤 요리를 해야 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요리 전문가의 유튜브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엄마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요리 잘하는 친구에게 레시피를 얻어오기도 했다. 심지어 도서관에서 요리책을 빌려오기까지 했다.


그러다 다가온 내 차례, 지금 기억으론 자취하던 친구 중 한 명의 생일이 맞물렸길래 당연히 미역국을 끓여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생처음 끓여보는 미역국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집에서 먹던 맛을 내고 싶어서 알아보던 중 저렴하고 간편한 참치 미역국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정육점에 팔던 비싼 소고기 대신 마트에서 천 원이면 살 수 있는 참치로 미역국을 끓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곧바로 참치를 사 와서 미역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미역을 불리고 불린 미역을 참기름에 볶다가 적당량의 물을 넣고 팔팔 끓인 다음 참치를 넣고 소금과 국간장을 넣어 한 번 더 팔팔 끓이기만 하면 되는 미역국, 처음이라 미역의 양도 가늠이 안가 엄청 많은 양의 국이 완성되었다는 점과 많은 미역 사이에 잘 보이지 않았던 참치의 양이 비교되었다는 점을 제외하곤 나름 괜찮았던 것 같다.


그로부터 20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때 함께 자취했던 친구들과 최근 오랜만에 안부를 묻고 함께 식사를 했는데 그 자리에 참치미역국 이야기가 잠시 등장했다. 풋풋한 대학생이었던 우리는 모두 결혼을 하고 아빠가 되었는데 참치미역국 덕분에 다시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한참을 웃고 떠들고 추억했다.


지금도 난 가끔 참치 미역국을 끓여 먹는다. 그때와 달라진 것은 음식을 함께 나누는 대상이 친구들이 아닌 가족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마일드 참치가 아닌 미역국용 참치가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 정도다.


참치 미역국은 내게 과거의 추억을 소환하기도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또는 실패 확률이 낮은 몇 안 되는 요리가 되었다. 아이들도 감사하게 내가 미역국 한솥 끓여주면 김치 한 종류의 반찬과 함께 두세 그릇 뚝딱 해치울 정도니 내가 참치미역국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이 나온 김에 오늘은 아이들에게 옛 추억 삼아 참치 미역국을 끓여주기로 했다. 그 참치미역국을 먹으며 아이들과 옛날이야기를, 추억의 아빠 이야기를 나눠보려 한다. 덕분에 나도 잠시 그 기억에 잠겨보려 한다.


_by 레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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