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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오 Dec 08. 2021

내가 어떻게 '청소년지도사'가 되었냐면?

평범했던 아이가 특별해짐을 경험했을 때

#17살의 나는 꿈이 없었다.


한창 꿈을 꿀 나이였던 17살, 나는 꿈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적어놓은 장래희망란은 공란으로 나둘 수 없어 눈앞에 보이는 '선생님'을 적어놓은 것이 전부였다. 졸업을 1년 남겨둔 고등학교 2학년, 친구들은 모두 원하는 대학과 학과를 목표로 전투적으로 자신의 갈 길을 찾아가는데 그렇지 않은 나는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겼다. 그래서 어떤 날은 진짜 선생님이 되고 싶다가도 또 어떤 날은 운동장에 뛰어다니는 축구선수가 되고 싶기도 했다. 억지로 내 삶에 있지도 않은 꿈을 끄집어냈다. 하지만 그렇게 한순간에 나의 내일을 결정하기엔 난 너무 어렸다. 키도 크고 목소리도 굵어졌지만 그것만으로 어른이 될 수 없었고 사회에 나가기엔 한없이 부족해 보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억지로 대학에 진학했다. 원하지 않았지만 어느 대학의 건축학과가 어느덧 내 전공이 되어 있었다. 특출 나게 잘하는 것 하나 없었지만 초중고 개근상 수상의 경력을 가지고 있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성실하게 수업을 듣는 것뿐이었다. 수업을 듣고 있었지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듯 나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내 삶의 주인이 나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학 생활이 전혀 즐겁지 않았다.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갑자기 찾아왔다.


다니는 듯 아닌 듯 그렇게 한 학기를 마친 여름방학, 난 친구를 따라 제주도 장애인 캠프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저 제주도라는 특별한 공간이 궁금해서 참여했던 캠프에서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발견할 줄은 꿈에도 모른 체.


3박 4일간 캠프에서의 나의 역할은 함께 짝꿍이 된 장애인 형 한 분을 케어하는 것이었다. 지체장애가 있던 나의 짝꿍 형이 관광하기 좋게 휠체어를 끌어드리는 것은 물론 식사와 잠자리 등을 책임지는 것이 내 임무였다. 나 자신 하나도 감당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의 손과 발이 되어 온종일을 돌아다니다니. 체력적으로는 힘이 들었지만 평범했던 내가 특별해지는 느낌에 제주도는 이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짝꿍 형을 통해 나를 보게 되었고 내가 케어 받는 기분을 받았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캠프가 끝나서도 난 그 여운이 오래 남았다. 아니 그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던 것 같다. 여름방학 내내 장애인복지관을 시작으로 노인복지관. 사회복지관, 청소년수련관 등의 다양한 자원봉사 터전을 찾았고 그때마다 내가 어떤 일에 흥미를 느끼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드디어 알았다.



#진로를 찾은 순간, 난 망설이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고 흥미를 갖은것을 직업으로 가져갈 수 있을지 잠시 고민했지만 봉사활동을 통해 나가야 할 방향, 진로의 방향을 정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방향을 설정하고 나니 속도를 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다양한 대상으로 경험했던 봉사활동 중 내 가슴을 가장 뛰게 하는 '청소년'이라는 학문을 더 자세히 탐구하고 싶은 궁금증이 생겼고 그 길로 청소년학과로 전과 신청을 했다.


공대생이 인문대생으로 변화하는 과정, 새로운 학문에 적응하는 시간은 의지만큼 빠르게 변화되진 않았지만 서서히 하나씩 천천히 배우고 익히고 경험하길 즐겼다. 남들보다 1년 늦긴 했지만 하고 싶었던 것을 하고 있는 순간이 흥미로웠고 재미있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것이라는 말이 내게로 와 실제가 된 순간이었다.



#그렇게 난, 청소년지도사가 되었다.


청소년학과를 다니며 틈틈이 자원봉사활동과 아르바이트, 동아리 활동을 병행했지만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성실함을 무기로 하루하루를 감사함으로 보냈다. 그렇게 노력으로 대학생활을 보낸 결과, 난 무사히 학사모를 쓰고 졸업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학과 커리큘럼에 따라 배우고 동기들과 정보를 교환하며 다양한 경험을 했던 것도, 필기시험과 대면 면접, 그리고 자격연수를 거쳐 청소년지도사 자격도 소지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내겐 감사한 일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청소년 현장으로 나가는 것뿐이었는데 그마저도 고맙고 감사하게 처음 응시했던 면접 장소에 좋은 기회를 부여받았고 진짜 청소년지도사가 될 수 있었다.


내가 청소년지도사가 된 이유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내 삶의 터닝포인트를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진로를 찾지 못해 숨 막혔던 지난날을 청산하고 내 안의 나를 발견했던 소중한 순간을 잊지 않았던 것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주었다.


그로부터 13년간 같은 곳에서 난 청소년지도사로 일하고 있다. 평범했던 내가 특별해지는 경험을 했던 그 순간부터 난 어쩌면 이 길에 들어섰는지 모른다. 청소년이란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뛰던 예비 청소년지도사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가슴 설레며 청소년을 만나고 있다. 청소년과 함께 행복한 세상을 꿈꾸며 말이다.




#덧붙이는 이야기(예비 청소년지도사, 또는 꿈이 없어 힘겨워하는 모든 이들에게)


혹시나 이 글을 보는 예비 청소년지도사, 또는 꿈이 없다고 힘겨워하는 모든 이들에게 나의 사례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 꿈이 없어도 괜찮고 꿈을 찾아가는 것을 힘들어하는 것도 괜찮다. 다만, 자신의 터닝포인트(또는 자신의 진로)를 발견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에는 게을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방향 설정의 기회가 찾아온다면 놓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내가 그랬듯이 그대도 그 기회를 잘 살리길 기도하겠다.


_by 레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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