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트가 먹고 싶어서 집 앞에 있는 토스트 가게에 들렀던 내가 맛있는 토스트를 받아 들고 가게 문을 열고 나가면서 직원들에게 건넨 인사였다. 나는 가끔 이렇게 처음 보는 상대방의 행복을 전하는 인사를 하곤 한다.
이 버릇, 또는 습관은 나의 아버지로부터 시작됐다. 어릴 적 아버지는 차를 타고 가다가 톨게이트나 주유소에 들려 일을 마친 후엔 상대방에게 반드시 행복하시라는 인사를 하셨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항상 웃고 계셨고 인사를 받은 상대방의 입가에도 늘 미소가 번지는 광경을 나는 자주 목격했다. 아버지의 습관은 어느 순간부터 내게 스며들어 나도 난 아버지처럼 그런 인사를 습관처럼 하고 다니게 된 것이다.
<행복하세요> 이 짧은 다섯 글자는 다른 사람들의 행운을 빌어주고 복을 기원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있다. 행복은 기쁨과 만족의 상태로 찰나의 순간 던져지는 그 마법과 같은 행위는 자신의 행복을 비는 주문이기도 한 것 같아 보였다. 아버지의 마음과 주문이 담긴 인사는 뒤에 타 있던 내게 자연스럽게 대물림되었다. 나는 그 인사가 좋았다. 인사를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도의 교육이나 훈련은 없었지만 따라 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습관이 되었다.
오래전 들었던 라디오 이야기 하나가 생각난다. 경제 위기로 상황이 좋지 않던 그리스에 사는 어느 노부부는 실업자에 연금도 적었고 또 거기에 누군가의 집에서 세 들어 살며 기술을 배우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의 기준에선 매우 불행한 상황이었는데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고 한다.
무엇이 그리 행복하신지 리포터가 물어보니 "어릴 적부터 아버지께서 우리 삶은 항상 행복을 바탕에 두고 살아가고 있다"라고 말했고 "그 바탕에 지금 이렇게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왜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오히려 반문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행복을 대물림하고 또 그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었다. 우리처럼 아등바등, 일에 치여 삶의 여유는 찾아볼 수조차 없이 누군가와 비교하며 나 자신을 낮추고 있을 때 그들은 자신의 삶을 존중하며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멋져 보인다.
자녀가 있는 아비로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자녀를 키우고 그들에게 그것을 대물림해 줄 것인가' 아니면 우리 아버지처럼, 또는 그리스의 노부부처럼 '행복에 대한 확실한 가치관을 정립시켜줄 것인가' 오래전 라디오의 작은 사연이 아버지의 "행복하세요"라는 인사와 더불어 나를 돌아보게 하는 순간이다.
그러면서 나는 아버지의 여러 가지 면을 존경하고 담고 싶지만 특히 이 부분(행복의 메시지가 담긴 인사)에 대해서 더 감사하게 된다. 나의 이런 모습과 작은 습관을 보고 나의 아이들도 행복을 나누고 인사하길 바라본다. 아버지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나의 좋은 것이 아이들에게도 대물림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