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라는 말은 이어령 교수님의 말씀에서 얻어왔어요.
'너 존재했어?'
'너답게 세상에 존재했어?'
'너만의 이야기로 존재했어?'
- 김지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
44년 살아온 이야깃거리가 있다고 서사가 많다는 말을 함부로 쓰지는 못했을 거예요.
다만 지금껏 보아온 바로는, 제가 평균적인 사람보다 예민함은 좀 더, 좀 많이, 실은 아주 많이 가지고 있어서 각 이야깃거리마다 의미를 담고 차곡차곡 기억 장치에 모아 왔다는 점은 있습니다.
죽음 직전에 삶을 돌아볼 때, 떠올릴 이야깃거리가 많고 그때의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고, 그때 함께했던 사람들을 생각에서나마 만날 수 있으면 나만의 이야기로 살아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짐작해 봅니다.
아이들과 함께 몇 번씩 반복해서 본 <벼랑 위의 포뇨>에는 양로원 할머니들이 나와요.
휠체어에 앉아 따뜻한 햇볕을 쬐는 것만이 하루의 유일한 일과인 할머니가 되었을 때 삶을 돌아보면 어떨까.
과학 실험에서 변인을 통제하고 조작 변인에만 변화를 주어서 결과를 도출하는 것처럼, '건강 상태가 비슷하게 양로원에서 지내는 아흔 살 할머니'의 모습을 상상했어요.
극단적인 두 경우로 나누어 봅니다.
첫째, 서울에서 태어나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곱게 자라, 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유산으로 건물을 받고 평생 임대료 받으며 인생을 즐기다 그렇게 아흔이 되었다고 하면.
딱히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어서 결혼하지 않았고, 적당히 몇 번 연애를 하다가 중년 이후로는 취미 생활을 하며 살고, 인생의 고뇌라고는 임차인이 월세를 제때 납부하지 않아서 연락해야 하는 것과 간간이 챙겨야 하는 건물 수리와 세금뿐.
어찌 보면 지금 대한민국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꾸는 삶을 상상했어요. 아무 일 없이 평온하고, 온화하고, 고통도 없는 삶.
그런데,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지요?
이게 뭐야? 인생이 뭐 이래? 하는 생각.
극단적으로 단순하게 표현하기는 했어도,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둘째, 가난한 노동자 부모님과 함께 지방에서 살다가, 고등학교 졸업 후 거의 스스로 삶을 책임져야 했던 삶.
열정도 많고 능력도 뛰어나지만 하는 일마다 제대로 풀리지 않는 운.
단란한 가정을 꿈꾸며 결혼했지만 남편은 결혼 후 무능력을 드러냈고, 지독한 시집살이를 견디며 혼자 집안을 건사한 아낙.
일이 잘 풀리려다가도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사방에서 튀어나와 주저앉히는 삶.
성공과 찬란함과는 정 반대편에서 일생을 살았던 이 분이 아흔 살에 양로원에 앉아 햇볕을 쬐며 삶을 돌아본다고 하면요,
그 자체가 정말 근사할 것 같지 않아요?
'그래, 그때 그렇게 또 인생의 산을 넘었더랬어.'
라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는 이 분의 얼굴이, 아까 곱게만 살아온 할머니보다 훨씬 아름답게 반짝일 것 같아요.
어려움을 겪었기에 세상 모든 존재가 귀함을 알고,
쉽게 얻은 게 없었기에 당연한 것 하나 없이 모두가 감사하고,
겪은 일이 많기에 하나의 현상에서 많은 의미를 꺼낼 수 있고요.
'내 삶은 찬란하게 빛나야 한다.'라고 콧대를 높여 자신하면 어두움에 닥쳤을 때 실패라고 정의 내리겠지요.
반면 '어려움이 왔으니 또 하나의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겠구나.'라고 어둠까지 끌어안을 때에는 반딧불만한 빛으로도 세상의 윤곽을 볼 수 있을 거고요.
어둠 한 자락 없이 밝기만 한 삶보다는 어둠을 끌어안는 쪽을 선택합니다.
그 과정에서 나만의 이야기가 나온다고 뿌듯해하며, '낮과 밤이 모두 있는 게 사람 사는 세상이지'라고 싱긋 웃으려 합니다.